신동화 명예교수의 살며 생각하며(281)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나무를 늙었다고 하는가. 단지 거수(巨樹) 또는 거목(巨木)이라 부른다. 가끔 노송(老松)이라고도 한다. 진정 늙은 소나무라기보다는 오래된 소나무라는 뜻이나 보통 고목(古木)의 뜻이 더 어울린다. 아무리 오래된 나무라 할지라도 살아있으면 한해가 지나면서 나이테를 한 켜 더 덧대지 않는 경우는 없다. 그래서 나무의 나이는 아주 쉽게 알 수 있다. 큰 나무를 절단한 면을 보면 아름답고 둥그렇게 기하학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나이테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간격이 서로 다르다. 한 면에서도 크게 간격이 있는 쪽이 있는가 하면, 다른 쪽은 더 촘촘하게 배열된 것을 볼 수 있다. 조건이 좋아 빨리 자란 해는 나이테의 간격이 넓고, 가뭄 등 여건이 좋지 않은 경우 성장이 더디어 그 폭이 좁다. 또 나무가 서 있는 쪽에서 남쪽과 북쪽을 가려 나이테의 간격 차이가 난다. 자람의 차이는 있지만 한해도 쉬지 않고 자라면서 자기가 처한 자연환경에 따라 성장을 적응해 가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고 일정한 시기가 되면 어김없이 자손을 번성시키기 위한 자기 특성에 맞는 꽃을 피우고 씨를 맺어 자기 후손을 잇는다. 성장과 꽃 피우기를 한해도 멈추는 경우가 없으며, 이런 성장과 씨 맺힘을 멈추는 때가 자기 수명을 다하는 때이다.
 
나무에 따라서는 수명은 크게 다르며 은행나무나 느티나무는 수백 년을 거뜬히 살아가고 미국의 한 나무는 수명이 천년을 넘는다고 한다. 며칠 전에는 용문사의 은행나무를 접하였다. 수령이 500년이 넘는다. 또한, 봉은사에도 600년 된 은행나무가 정정하다. 이들 거목도 어김없이 봄에 꽃을 피우고 가을에는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다. 인간은 겨우 100년을 사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는 않고, 늙어가면서 성장을 멈추고 활력을 잃으면서 노쇠의 과정을 거친다. 자손 번식능력은 훨씬 이전에 잃어버린다. 성장하지도 못하고 후손을 이을 능력도 없으면서 꽤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한다. 그러나 식물과 다르게 인간에게는 육체의 측면을 넘어 정신영역에서 훨씬 더 큰 역할을 한다. 눈에 보이는 물리적 형태인 육체는 변해가지만, 내면에서 우러나는 정신영역은 육체의 늙음과는 반대로 더욱 깊어지고 원숙해가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인간과 식물의 차이긴 하지만, 유형의 식물에서 무형의 정신영역을 강조하는 인간이 배울 것이 많다고 여긴다. 우선 불교에서 말하는 탐ㆍ진ㆍ치(貪瞋癡)의 영역은 식물과는 관계가 없다. 탐하고 성내며 어리석음의 조짐은 아예 없고 주어진 자연의 여건에 순응하고 적응하면서 그것에 대하여 한 번의 불평이나 불만족의 속내를 내보이지 않는다. 모든 자연환경에 따르며 자기를 맞춰간다. 물론 동물과 식물의 차이는 있고 생명체로서 공통점이 있기는 하지만, 동ㆍ식물 모두가 지구상의 여러 물질을 이용하여 생명현상을 유지하고 있다. 식물은 동물과는 다르게 자기가 생산하는 모든 물질을 동물들에게 이익을 주면서 생을 이어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식물이 끊임없이 생산하고 있는 산소가 없으면 어느 동물이 살 수 있겠는가. 그리고 만들어내는 모든 생물자원을 동물의 삶에 없어서는 아니 되는 자원이 되고 있다. 식물은 이렇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주고 또 생물이 살 수 있게 산소까지 무한으로 공급해주고 있으니, 같은 생명체라도 그 자체의 근본이 다르다. 무한히 베푸는 식물과 여기저기에서 착취하여 빼앗는 동물과는 근본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생태계에서 어느 것이 옳고 그름을 따질 수는 없지만, 그 가치는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동물에게는 유한하고 짧은 생을 주었지만 나무나 식물에는 긴 수명이나 다시 태어날 수 있는 후손, 씨를 많이 배려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나도 나무처럼 내 몸 어디엔가는 나이테가 하나씩 하나씩 쌓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는데 그곳을 내 지능으로는 찾을 수가 없구나.
 
오늘도 내가 스쳐 지나온 소나무 가로수는 열심히 여린 송순을 밀어내면서 성장을 하고 있고, 엊그제까지 송홧가루를 뿌리더니 깜찍한 초록색 작은 솔방울을 가지 끝에 매달고 있다. 가을이 되면 송자(소나무 씨)가 날개를 달고 멀리 날아가 새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기적을 이루겠지. 그 씨 속에 우리 알고 있는 생명, 우주가 들어있으니 이 또한 신비한 일이 아닌가. 나무는 시간의 흐름을 의젓이 받아들이며 흔들림이 없이 멈추지 않고 생장을 계속하는 모습은 또 다른 깊은 교훈을 주고 있다.
 
멈춤은 결국 생을 마감했다는 증표이고 다시 오지 못함을 뜻한다. 이 초여름에 들어서는 계절에서 나무가 순간도 멈추지 않고 성장하며 생명의 활력을 얻는 모습에서 나도 어쩔 수 없이 늙음을 받아들이나 육체가 아닌 정신적으로 내 잠재한 성장의 노력을 계속하련다.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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