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을 인정하고 '내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지혜 필요
신동화 명예교수의 살며 생각하며(280)
발효는 시간을 두고 참고 기다리면서 변화된 결과를 기대하는 한 과정이다. 우리의 생각도 발효를 거쳐야 더 성숙된 결과를 얻는다고 생각한다. 음식에서 발효도 비슷하다. 온갖 음식에 발효라는 말이 붙고 심지어 한약에서도 발효가 붙지 않으면 더 고급스러움을 나타낼 수가 없다. 발효홍삼, 발효구기자. 이미 홍차는 발효를 거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발효커피는 그 향이 순하고 독특하다. 발효를 통하여 새로운 맛과 향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우리 음식의 특징은 발효의 맛이다. 어느 한식치고 발효식품을 외면한 것이 있는가? 음식 맛을 내는 조미료는 간장, 된장, 고추장, 청국장은 대표 발효식품인 장류로 분류되고 이제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으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김치는 너무나 유명해졌다. 그리고 밋밋한 맛을 갖고 있는 생선류를 발효시킨 젓갈은 어떤가. 그 독특한 향에 맛이라니. 그 고유한 향에 곁들인 감칠맛은 한번 맛을 들이면 평생을 잊지 못한다. 발효식품은 그 근원은 미생물이지만 미생물 그 자체가 아니고 미생물이 자기 생존을 위해서 유기물을 분해하여 에너지를 얻는 생존 과정이고 이 과정에서 얻어지는 산물을 우리는 즐기고 있는 것이다. 식초는 어떤가. 술의 기본인 에틸알코올을 먹이로 하여 자기의 에너지를 얻는 수단으로 식초균이 작용하여 더 단순한 초산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이다. 미생물이 생명현상을 유지하기 위하여 활동하는 과정에서 내는 부산물들이다.
그렇다, 발효는 가끔 숙성이라는 말과 함께 사용한다. 숙성도 학문적으로는 생체가 갖고 있는 효소의 작용으로 맛과 향이 인간에게 좋은 방향으로 변하는 과정이긴 하지만 인간에게는 정신적으로 숙성된다는 것은 생각의 깊이가 깊어지고 분별력을 갖출 때, 우리는 숙성된 인격을 갖췄다고 말한다. 발효와 숙성은 아마도 형제간이 아닐까 여겨진다. 다시 발효로 돌아가서 보면 이 자연에서 발효가 일어나는 것은 음식만이 아니다. 넓게 본다면 미생물이나 효소에 의해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발효라고 말할 수 있으나 인간의 기준으로 이를 구분하고 있는 말이다. 즉 인간의 구미에 맞고 독성을 띠지 않으면 발효라 하고 거부반응이 있거나 먹을 수 없을 때는 부패라고 구분하나 기능을 제공하는 미생물의 입장에서는 전면 차이가 없고 단지 자기 생존을 위한 자연현상일 뿐이다.
우리 청국장은 우리에게 친근한 맛있는 음식이지만 접해보지 않은 외국인들에게는 거북한 음식이 될 것이며 노르웨이에 수르스트래임이나 중국의 콩 발효식품인 수후 등은 친숙하지 않은 독특한 냄새로 인하여 발효식품을 선호하는 외국인에게는 별로 친숙하지 않으나 그 지역 사람들에게는 잊지 못할 고향의 맛이며 어머니를 생각나게 하는 전통음식이다. 이런 발효식품을 대할 때마다 우리의 판단기준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독단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이 다름을 상대를 수용하고 받아들이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계기로 삼으면 내 사고의 폭을 훨씬 더 넓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어찌 음식에서만 발효를 한정 지을 수 있겠는가. 흔히들 옹고집이라고 하거나 소통이 어려운 사람의 경우 자기중심적 사고에 갇혀있는 경우가 많다. 내 생각이 옳고 타인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폐쇄성, 그래서 소통의 통로를 스스로 막아버린 경우,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벽창호나 독불장군이라 부르고 대화의 상대로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내 생각을 발효하면 다른 결과가 나올 터인데.
이 세상에 지금 있는 이 상태가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 있겠는가. 모두가 지금 현재의 순간 상태를 보고 있는 것이고 어제의 것, 그리고 다음 올 미래가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어찌 우리가 알 수 있겠는가. 계속 변하고 달라지는 지금 마주한 것들에 목을 매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현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더욱 권력과 부를 가지고 그것이 전부이고 영원할 것이라 여겨 거들먹거리는 양상을 보면 조금은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발효식품에서 배우라고 조언하고 싶다. 어느 한순간도 그대로 있지 않은 김치의 맛, 그리고 청국장의 변화, 선호와 비 선호는 사람에 따라 다름을 알고 내 기준을 결코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 생각의 폭을 넓혀야 살만한 세상이 된다.
다름을 인정하고 내가 결코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지혜가 필요하다.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 했던가. 같은 물도 보는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르다.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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