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마무리, 우리 삶에서 가장 본질적인 순리
여러 인연과 맺었던 고리 시원히 끊고 스러지는 것
살아왔던 나를 깨끗이 정리하면서 마무리 짓는 것은 당연한 자연 순리
신동화 명예교수의 살며 생각하며(268)
많은 사람은 죽음을 얘기하면 못 들을 것을 들은 것처럼 거북해한다. 지금 살면서 생각하고 할 일도 많은데 구태여 죽음을 꺼내 기분을 우울하게 하느냐고 핀잔이다. 특히 젊은이보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는 경우 그 반응은 더 심한 것으로 느낀다. 아침 해가 떠서 저녁 아름다운 석양빛을 남기고 스러지는 것과 같이 이생이 있으니 그 마무리도 아주 명확한 일인데 이를 금기시하는 것은 나는 아니라는, 자신을 순간적으로 속이는 마음의 상태가 아닐까 여긴다.
나는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편에 속한다. 그래서 점이나 사주니 하는 것은 별로 마음에 두지 않는다. 내 하루가 오늘 주어졌고 나의 의지로 정해지는 것이지 어떤 나와 관계없는 손에 의해서 좌우되지는 않는다고 여기면서 살고 있다. 혹 운명론자는 내가 건방 떤다고 얘기할는지 모르겠다. 나는 나대로 생각하고 살고 있으니 불편한 마음을 거둬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가끔은 이생에서 생명을 받고 살고 있는데 마감 후에는 과연 어느 상태가 될까 하고 궁금할 때가 있다. 우리 부모님, 그리고 조부모님 그 위로 올라가면 무덤을 통하여 접하는 증조, 고조, 할아버지는 지금 어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13살 중학교 입학하자마자 돌아가셨다. 그때 나이 48세라고 했다. 그때 돌아가신 아버님은 현재 그 48세로 멈춰 있을까, 아니면 우리와 같이 나이를 계속 붙여가고 있을까. 48세로 멈춰 있다면 80세로 노인 축에 드는 내가 40대 청년을 아버지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조금은 헷갈린다. 우리 어머니도 92세까지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돌아가셨다. 벌써 10년도 넘는다. 그 어머니는 지금의 나이로 보면 100세가 훨씬 넘었을 터인데, 나이가 더해지면서 100세를 넘고 계실 것인지.
운명에 관한 생각은 각자의 믿음, 생각, 처한 환경, 지식의 정도, 종교에 따라 달라질 것이며 나이나 자기가 처한 상황에 따라서도 달라지리라 생각한다. 나 자신은 지금까지 살아온 궤적을 뒤돌아보면서 운명은 없다고 믿고 있지만, 탄생과 소멸하는 죽음이 있다는 사실은 운명을 아니 수용할 수가 없다.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죽음은 마무리라고 하는데 이는 자기가 살아온 이 세상과 많은 가족, 친지들과도 이별을 의미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과의 이별도 또한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다. 어찌하면 나 자신과의 이별이 더 가까이 다가오는 개념이 아닐까 한다. 여러 종교에서는 죽음 이후를 얘기하고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것을 밝혀주고 있으며 일부 사후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의 증언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내 마음속으로 수용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종교에 따라서는 개념이 다르기는 하지만 모든 생명체에는 근본적으로 불성이 내재해 있다는 불교의 교리와 인간 중심으로 타 종교와는 차이가 있으나 이생과 사후세계에 대한 나 나름의 명확한 개념 점검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오늘을 맞고 있다.
죽음은 인간이 탄생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하여 피하고 싶은 종말의 개념이다. 절대 권력과 최대의 부를 축적한 사람도 그 운명을 비켜나가지는 못하였다. 피라미드에 안치된 미이라도 다시 환생하지 못하였고 세계 최강의 권력을 손에 쥐고 천하를 호령했던 진시황도 죽음을 피할 불로초를 구하지 못하였으니 이 순리를 거역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상황이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죽음도 병으로 치고 영생할 방법을 찾고 있다는데 이렇게 되는 경우 불사의 재앙을 불러올 수 있는 끔찍한 일이라 여겨진다.
세계적인 현상으로 장수가 일반화되고 있는데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장수에 따른 노인 인구의 비율 증가와 신생아 수 감소는 너무 극명하여 국가적 재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는 죽음이 미루어지는 장수가 과연 축복받을 수 있는 현상인가에 대하여 회의가 느껴진다.
오래전 고향에 살 때 집안에 우환이 들면 병원보다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하는 것이 예사였다. 한밤중에 치러지는 행사는 돌아가신 조상의 혼을 불러 소통하고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기원하면서 막을 내린다. 조상님이 왔다 간 흔적을 잘 차려진 상 밑에 놓아둔 쌀가루 쟁반에 남겼고 무당의 해석이 뒤따랐다. 이런 행사를 치르면서 조상의 혼령을 불러왔고 내가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곤 했는데 지금 이런 얘기를 하면 그 뜻을 수용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 생에서 생명을 마무리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여기면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긴 하지만 어찌 보면 늙음을 거쳐 마무리, 우리 삶에서 가장 본질적인 순리다. 이 순리에 따라 나의 모든 것을 정리한다고 하면 홀가분한 생각도 든다. 여러 인연과 맺었던 고리를 시원히 끊고 스러지는 것, 살아왔던 나를 깨끗이 정리하면서 마무리 짓는 것은 당연한 자연 순리다. 오늘 배터리가 다한 벽시계가 움직이기를 멈추었다. 내가 갈 길이 아닐까 한다.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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