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화 명예교수의 살며 생각하며(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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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불안하게 두 바퀴로 움직이는 도구다. 움직이지 않으면 서 있지 못한다. 스스로 안정적으로 서 있으려면 다리가 3개나 4개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쓰는 모든 집기는 다리로만 서 있기를 지탱하려면, 이 개수가 필수다. 인간이나 닭이 두 발로 자유롭게 걷는 것은 예외이나, 이들은 잘 발달한 발가락이 있다. 그렇다 해도 항상 불안하다. 안정적인 자세를 위해 동물은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4개의 발이 있고 조류만이 2발을 이용하나 이들도 2개의 날개가 움직이게 하는 동력을 주고 있다.

어릴 때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형의 친구들이 어찌나 부러웠던지 점심 먹으며 우리 집을 방문하여 한쪽에 받쳐 놓았던 자전거를 슬쩍 타보다 넘어지고 페달이 부러지는 사고를 내기도 하였다. 이실직고하지도 못하고 한쪽에 숨어 끙끙댔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페달이 부러져 버린 자전거를 타고 갔을 형 친구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면서 미안한 생각이 든다.
 
여하튼 자전거가 스스로 달리는 것을 보면 신기하고, 움직여야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우리 삶에 교훈을 주고 있다. 우리나라에 자전거가 들어온 역사를 1897년경으로 조선 전체를 통틀어 자전거를 타는 조선인으로 서재필과 윤치호 단 두 명이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개화기에 새로운 문명을 접한 분들이 서양의 움직이는 도구를 들여와 타고 다녔으니 얼마나 신기하고 관심을 끌었겠는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자전거를 탄 사람은 서재필이었고 윤치호가 배웠다고 한다. 독립협회 활동을 하면서 타고 다녔고 이를 본 보부상들이 생존의 위협을 느꼈다고도 알려지고 있다.
 
새로운 물질, 문명이 우리에게 접근할 때는 기존 세력의 저항이 있었다는 것을 역사에서 자주 접하고 있다. 영국의 증기기관이 도입되면서 기존 집단의 거친 거부 운동이 있었다. 미국에서도 처음 자동차가 거리에 나오자 마차를 끄는 사람들의 집단 반발이 있었고 이들의 압력으로 법까지 만드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자전거는 그만큼의 파괴력은 없었지만, 조선의 개화기 때는 새로운 도구로 많은 관심을 끌었다는 것은 가히 짐작이 간다. 아마도 선각자들이 개화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적 수단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자전거는 스스로 서 있을 수 없고 또한 움직이지도 못한다. 세워 놓을 때도 받침이 있어야 스스로 서 있을 수 있다. 바퀴 두 개만을 갖고 있는 주어진 운명이다. 자전거는 움직일 때만 그 존재 가치가 빛난다. 움직여야 자기의 필요성을 증명할 수 있다. 자전거의 변화된 역사를 보면 체인으로 이어진 페달을 밟아 힘을 바퀴에 전달하여 움직이게 하는 초보적인 동력에서 이제는 휘발유 엔진이나 전기를 이용하여 움직이게 하는 동력 혁명을 일으켰고 지금도 계속 새로운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오토바이, 스쿠터 등이 발전한 모습이다.

자전거 타기를 배울 때를 되짚어 보면 움직여야 스스로 설 수 있는 속성을 맞추기 위해 손으로 빠르게 끌고 가다가 움직이면 잽싸게 올라타야 하는데 말처럼 쉽지는 않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뒤쪽에서 잡아주고 밀어주면 위에 올라타 겨우 페달을 밟는 연습을 한다. 계속 몇 번 뒤에서 잡고 있다가 연습이 되면 슬며시 뒷 지원이 없어도 자기 스스로 달릴 수 있게 된다. 어린이용 자전거는 보조 바퀴를 달거나 3발 자전거가 일반적으로 많이 이용되나 속도가 빠르지 않으니 자연 2발 자전거로 이동하게 된다.
 
자전거를 보면 우리 인생 살아가는 것과 비슷한 경로를 거친다고 여겨진다. 세상에 어머니 몸에서 떨어져 나와 발과 손만을 움직이며 온종일 누워 지내다 어느 날 온 힘을 다해 뒤집기를 하고 조금 지나면 기는 연습, 조금 힘이 붙으면 하늘을 향하여 서기 시작한다. 아장아장 걸어 돌떡을 돌릴 때는 불안한 두발이다. 걷기 시작하면 뛰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이때가 세발자전거도 시작하여 도움을 받아 두발자전거로 옮겨가면 성인의 문턱에 들어서기 시작한 시기다.

이렇게 자기 삶을 이어가다가 어느 때가 되면 그 익숙했던 자전거를 육체적 제약으로 타지 못하는 때가 오고야 만다. 자전거가 움직이지 못하면 제 기능을 할 수 없듯 우리의 삶도 육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어야 주어진 일을 해내지 그 움직임이 불가능하면 사회와 단절되고 이어지면 생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극한 상황에 이르러 생리적 사망의 단계에 접어든다. 사회와 격리되고 생명체의 기능을 상실하는, 생을 마감하는 단계에 이른다. 그 누구도 피하지 못한 필연의 과정이고 자연의 섭리다.
 
쓰러진 자전거는 다시 세워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한번 쓰러지면 다시 설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 오래 멈추었던 자전거 타기를 생리적 멈춤이 오기 전 다시 시작하여 생의 활기를 더 연장시키는 것은 노욕일까.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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