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지보다 밝은 양지가 더 넓고
선한 사람들이 더 많이 있는 우리 사회를 믿고
더 나은 앞으로의 삶이 오고 있다는 것을 믿고 싶다” 

신동화 명예교수의 살며 생각하며(246) 

얼마 전 일간신문에 실린 내용이다. 한 젊은이가 처한 아픔을 기록해 놓았다. 저녁 화장실에서 갑작스레 쓰러진 아내를 응급실에 맡기고 결과만을 기다리는 젊은 남편, 그 아내의 몸속에는 얼마면 태어날 첫 딸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뇌사 판정을 받고 세상을 마주하지도 못한 아기의 생명도 어찌 부지할 수 있겠는가. 망연자실한 남편은 중환자실 대기 복도에서 먹지도 않고 한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충격이 커서 현실감각을 잃은 상태이고, 상황을 이해하기에는 저 너머에 자기 사고가 묶여있다. 이건 현실이 아니고 악몽이다 하고.

이 상황을 글을 통해 읽고 비통한 마음에 나도 몰래 눈물이 난다. 내가 인간임을 느끼는 순간이다. 다른 사람의 비통하고 아픈 슬픔이 스스로 나에게 전달되어 동질성을 갖는 순간이다. 남의 아픔을 내 것으로 느끼고 그 아픔에 슬퍼할 수 있어야 이 사회가 인간 사는 사회다. 그 기본적인 감정을 잃거나 무디어져 버린 사회는 짐승의 삶도 아니다. 

소가 새끼를 낳고 바로 혀로 핥아 몸에 묻은 물기를 제거하고 일어설 수 있게 도와주는 모습은 인간의 모성애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끔찍이 송아지를 돌보고 집안 개라도 자기 송아지를 건드리면 세차게 몰아내 버리는 것을 보면 새끼의 보호 본능을 인간과 어찌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젖을 떼고 독립할 때가 되면 인간의 욕심으로 송아지를 떼어 놓는데, 자기 새끼를 잃어버린 어미의 울음소리가 처절함을 넘어 울컥하는 저 마음 밑에서 올라오는 슬픔을 가눌 길이 없다. 며칠을 계속하는 예도 있으며, 이때는 여물도 먹지 않는다. 생각 같아서는 떨어뜨린 송아지를 어미 곁으로 돌려 보내주고 싶으나, 이제 그 송아지는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으니 어쩌랴,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 사회에 영아를 유기하거나 자기가 낳은 아이를 돌보지 않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들이 언론에 자주 등장한다. 출산 후 출생신고가 되지 않아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어린아이, 그 운명이 어찌 되겠는가. 먹먹한 가슴 속 응어리가 가시지 않는다. 그런 뉴스가 나오면 내 가슴앓이를 하지 않으려는 이기심으로 채널을 돌리고 멍한 가슴을 달래보나 그 아픔은 한동안 계속된다. 아기를 유기하고 돌보지 않아 생을 마감하게 한 당사자의 사정을 들어보지는 못했고, 나름대로 아픈 이유야 있겠지만, 일단 생명을 받은 인체는 나와는 다른 인격체라는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응급실에 있는 아내와 그 배 속에 있는 천금 같은 딸을 생각하며 몇 날 며칠을 응급실 통로에서 고통을 고통으로도 느끼지 못하는 남편과 영아를 유기하는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가늠이 가지 않는다. 인간도 동물의 한 종이며, 동물에서 가장 중요한 본능은 자손을 갖고 이들을 돌보면서 느끼는 행복과 보람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이 본능이 제대로 작동하는 경우도 있고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져 버린 경우를 지금 보고 있다. 

어느 인간 사회나 종교에서도 이 세상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생명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주어진 생명은 그 자체로 고귀하고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갖는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결코, 이 지구상 어느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대체 불가능 영역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생명 그 자체로 그 누구도 범할 수 없는 절대영역 안에 든다. 대상이 인간이건 동물이건 절대 생을 받았고, 받은 생명은 그 자체로 절대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고귀함은 인간의 범위를 넘어 수많은 동물, 더 넓히면 우리와 유사 이래 같이 해 온 식물들은 범주에서 빼놓아도 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길가 메마른 땅에 힘겹게 뿌리 내리고, 잎사귀를 하늘로 뻗치면서 연약한 꽃을 피우며, 때가 되면 씨를 맺어 또 다음 생을 이어주려는 이 식물의 생명도, 지구상에서 귀하고 귀하게 대접받아야 한다. 생명이라는 큰 범위로 우리의 사고를 더 넓게 생각하는 계기를 갖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지금, 이 순간도 중환자실 복도에서 가족의 아픔 때문에 제 몸 가눔이 어려운 처지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생명을 인위적으로 빼앗아 버리는 참혹한 인간이 공존하는 이 사회,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종교의 힘이 그래서 필요한가 보다. 더 현실적으로 이런 고통과 비이성적인 현상에 대하여 과연 이 사회는 어떤 해결법을 내놓을 수 있는가. 꽤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의 머릿속이 자꾸 하얘지는 근래의 사회양상이다. 그래도 음지보다 밝은 양지가 더 넓고, 선한 사람들이 더 많이 있는 우리 사회를 믿고, 더 나은 앞으로의 삶이 오고 있다는 것을 믿고 싶다.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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