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홀로 있어도 두렵지 않고 
세상과 떨어져 있어도 고민하지 않는 
도통의 경지에 이르기를 갈망해 본다”

신동화 명예교수의 살며 생각하며(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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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문득 생각나는, 한동안 뜸했던 허물없는 친구에게 전화하여 꽤 오래 가벼운 수다를 떨면서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그런 감정을 서로 이심전심으로 나눈다. 조금은 비어버린 듯, 허전한 마음 한구석을 채우는 흐뭇한 시간을 보내는 때가 되었다. 이른 봄 작년에 받아놓고 소중히 간직했던, 마음이 담아져 있던 꽃씨를 뿌려놓은 좁은 화단에서 나 몰래 스스로 움터서 어느 날 나와 눈 맞춤하려 가녀린 떡잎이 삐죽이 보인다. 부끄럼을 타는 듯 두 손을 내미는 것을 보고 환희에 가슴 벅찬 감정을 품으면 나는 젊음의 영역에 들어 아직 늙지 않았다고 자위한다. 나이로 가늠하는 것보다 육체가 안고 있는 정신의 영역에서 새로움을 찾고 자연의 신비에 감동하면 아직은 젊다. 그리고 그 젊음은 주위 환경에 관심을 쏟고 그 변화에 반응하면서 새로움을 발견하려는 마음의 자세가 되어있을 때의 영역이다.
 
내가 가진,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고 서운해하지 않는 마음, 스치는 듯 지나는 일상에서 잠시 여유를 부릴 줄 아는 나이, 그리고 내면의 관심을 표현하는 나만의 엷은 미소가 입가에 번지면 삶을 음미할 수 있는 자세가 되어있다. 혼자이어서도 또 다른 영역에 있는 나와 대화할 수 있는 경지를 이루는 나이, 삶의 시간이 축적된 여유로움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결실이다. 인생의 여정에서 내가 지금 맞고 있는 사계절의 한 구간, 탄생의 봄이 있었고, 성장하면서 몸을 불려가는 여름, 그 여름의 키움으로 과실을 얻는 가을, 그리고 과실을 바탕으로 조용히 쉼의 기간으로 접어드는 겨울, 그다음을 기약하기 위한 여행을 준비하는 시기를 맞는다. 그 쉼의 뒤안길에 어떤 여행이 준비되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혹은 아무것도 없는지 알 수는 없지만, 다음이 있다면 있을 수도 있고 없다면 그렇다고 치부해버릴 수 있는 치우침 없는 평정심을 갖고 한길만을 고집을 부르고 싶지 않다. 오고 있는 미래를 미리 점쳐서 오늘 내가 느끼고 있는 평정심을 흩뜨려버리는 어리석음을 물리칠 수 있는 세월의 무게 추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어쩌면 없는 세계, 무(無), 공(空)의 경지를 서서히 경험해보고 있다. 가버린 시간에 아쉬움의 텅 빈 공간이 아닌 텅 빈 층만의 가득함, 다 놓아버림에서 오는 자유로움, 그런 경지를 향하여 나를 다잡아본다. 지나온 봄, 여름, 가을의 정경을 마음속에 가득 채우면서 지금 맞고 있는 인생의 겨울 길도 결코 외로움 속에 멈춰 서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세월의 흐름은 나에게 육체적 변화를 주긴 하지만 또 다른 면, 정신적으로는 여유로움, 조급함을 자제할 수 있는 능력, 세상을 관조할 수 있는 눈을 갖도록 하는 것은 누구도 대신 받을 수 없는 나에게만 준 세월의 선물이다. 젊음은 부모가 준 큰 선물이니 이를 뽐낼 수는 없지만 늙음은 내가 가꿔가는 삶의 흔적이고 모두 내가 책임질 나만의 작품이다. 나이 먹음을 아름답고 의미 있게 가꾸고 다듬는 것은 오롯이 나 자신의 영역에 속한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이 세상 삶에서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진솔하게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과 자신만의 경험에 비례한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있고 헛되게 덤벙거리는 우를 범하는 실수를 하지 않는 슬기를 축적하려 노력하기도 한다.
 
이제 자신을 관리하는 자제의 능력의 한계가 있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는 용기도 나이 먹음의 자세이기도 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을 포함하여 타인의 허물을 받아들이고 지나칠 수 있는 여유를 갖는 것은 나이가 주는 또 다른 선물이기도 하다. 옹졸함과 편협함으로 흘러가는 나를 추슬러 다른 길도 있다는 것을 아는 지혜를 발휘할 수도 있다. 나이 듦은 나이 먹은 소나무의 껍질인 송린(松鱗)과 같이 밖이 아니라 굳은살을 내면에 갖추는 것이다. 우리 삶에는 늘 근심과 고통이 더불어 있지만, 그것이 노송을 쓰러뜨리지는 못한다. 그 고통을 통제하고 이겨내며 해결할 수 있음을 지나온 경험으로 안다. 단지 순간의 판단으로 결정하는 것보다 조금 밀쳐놓고 잠시 뜸을 들이는 시간을 가질 뿐이다.
 
노년의 삶은 낡은 몸이 전하는 병마와 함께하거나 운 좋으면 조금 멀리 떨어져 아픔을 이겨내는 생활에 반복하긴 하지만 그 어려움도 당당히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고 산다. 세월이 할퀴고 지나면서 남긴 몸의 상처, 아물기보다는 보듬어 안는 지혜가 필요하며 목숨이 붙어있는 한 함께 하는 것을 스스로 알고, 살다 보면 욕심부리지 않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임을 철들어 터득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마음속에 안고 있는 욕심들은 늙어가면서 버려야 할 추함의 대명사이다. 
 
이 세상에는 없는 것 3가지가 있다. 사는데 정답이 없고 끝까지 비밀도 없으며 어떤 공짜는 없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아간다. 그리고 더 분명한 것은 언젠가 죽을 것이고 나 혼자 죽는다. 죽음의 길에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함을 확실히 안다. 이런 알게 된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언젠가 홀로 있어도 두렵지 않고 세상과 떨어져 있어도 고민하지 않는 도통의 경지에 이르기를 갈망해 본다. 그런 꿈도 못 꾸나.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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