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부모님의 조건 없는, 부모와 다른 깊은 사랑이 결핍되었다는 것은 큰 아쉬움
정과 사랑은 같이 부대끼고 생활을 함께 할 때 스스로 생겨

신동화 명예교수의 살며 생각하며(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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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의 내 생활은 고등학교 때로 마감된다. 태어난 이후 생각이 지금까지 머물기 시작한 때부터 연을 다하여 영원히 헤어져야 할 아팠던 그 날까지 모시고 살면서 아마도 할아버지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여겨진다.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하여 대학 입학을 위하여 호롱불을 켜 놓고, 주무시는 할아버지 머리맡에서 대대로 물려받은 앉은뱅이책상에서 입시용 책을 읽으며 같은 방에서 생활하였으니. 

더욱 잊히지 않는 정경은 할아버지와의 겸상이다. 그때 인습은 아들과는 같은 밥상을 받지 않지만, 할아버지가 외롭지 않게 손자와는 같이 식사를 하도록 배려하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손자 사랑은 변한 것이 없나 보다. 할아버지와 겸상은 어릴 때 눈치가 없으니 할아버지는 경계의 대상이 아니고 항상 어머니가 어려웠다. 색다른 반찬을 할아버지 상에 올리면 내가 먼저 젓가락을 됐다가 어머니의 무언의 눈총을 받고 머뭇거리면 할아버지께서 먼저 젓갈로 떼어서 내 밥에 올려주시는 자상한 배려를 해주셨다. 그러니 눈총을 주셨던 어머니도 별수 없이 자리를 뜨시고 나중에 주의를 시키지만 그때뿐.

할아버지의 배려에 답하기 위하여 언제부터인가 할아버지의 머리를 깎아드리는 일을 내가 맡았다. 할아버지는 내 기억 속에서는 상투를 틀지 않고 머리가 자라면 그냥 깎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나 위엄 있고 아름다운 입술과 턱수염에 비하여 머리는 항상 깨끗이 밀어 버렸다. 할아버지께서 한 번도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동학혁명을 일으킨 전봉준 장군의 태생지와 멀지 않은 고향 근방이니 그때 나이로 봐서 어떻게든 연관이 있는 활동을 하셨으리라 후에 생각했지만, 돌아가시기 전까지 한 번도 직접 들은 적은 없으니 지금도 그냥 상상하는 수밖에. 그래도 나와 동생이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 중에 흔하지 않았던 삼지창도 있었고 돌로 만든 화살촉이 꽤 많이 숨겨져 있었으니 이들의 출처를 추적하면 이야기가 되겠지만 가족 중 그 누구도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래 지금도 그냥 나 혼자 미루어 소설을 쓰는 수밖에. 

다시 할아버지 머리 깎는 얘기, 그때는 머리 깎는 도구를 ‘기계’라고 불렀다. 아마도 일본 사람들이 만든 것 같은데, 전기가 없던 시절이니 톱같이 생긴 날이 앞뒤로 쌍으로 붙어있고, 이 위쪽 톱날을 손잡이로 좌우로 흔들면 고정된 아래 톱날 위를 움직이면서 머리를 자르는 작용을 한다. 위아래로 붙어있는 톱날을 꽉 조이는 나사가 스프링 위에 있었고 이 나사의 조임을 조절하여 머리 깎이는 정도를 조절하였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쯤은 할아버지 머리 깎기 행사가 거행된다. 이 거사는 맑고 좋은 날을 택하여 두엄자리 근방에 작은 의자를 놓고 보자기를 할아버지 목에 두르면 준비가 된다. 나는 ‘기계’를 준비하고 톱날 사이에 기계 마찰을 적게 하고 잘 미끄러지게 하는 ‘기계 기름’(그때는 그렇게 불렀다.)을 바르고 드디어 머리 깎기가 시작된다.

이 머리 깎는 기계가 언제부터 우리 집에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아버지가 국산이 없을 때이니 일제를 사 오셔서 할아버지와 본인의 머리 깎는 데도 사용하시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다. 이 기계가 오래 쓰다 보니 자르는 기능이 쇠퇴하며 머리가 뜯기는 경우가 많았다. 잘 잘리지 않으면 뽑히는 듯하니 꽤 불편하셨을 것 같은데 할아버지는 한 번도 내색하지 않으셨다. 이렇게 하여 머리 깎기가 끝나면 목에 둘렀던 보자기를 풀어내고 작은 솔로 잘린 머리카락을 털어내면 일차 중요한 내 일은 끝난다. 그리고 마무리로 잘린 머리카락을 두엄자리 안쪽으로 쏟아내는 마무리까지 해낸다.

참으로 오래된 얘기들이다. 그 시절 할아버지와 함께한 생활들, 그 넘치는 애정이 지금도 내 가슴에 따뜻한 온기로 남아있고, 호쾌한 웃음과 자애로운 미소는 내가 살아가면서도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누구든 부모와 조부모님이 없이 태어나고 자랐겠는가. 그분들의 힘을 뒤에 깔린 배경으로 살아가는 것은 행운이다.

이때를 살면서 아쉬운 것은 지금 세대는 부모의 보살핌은 넘치도록 과하게 받지만, 또 다른 보살핌, 조부모님의 조건 없는, 부모와 다른 깊은 사랑이 결핍되었다는 것은 큰 아쉬움이 아닐까 여겨진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 지금도 따뜻하게 느껴지는 그 마음을 지금의 손자, 손녀들은 얼마나 느끼고 사는지. 정과 사랑은 같이 부대끼고 생활을 함께 할 때 스스로 생긴다. 핵가족으로 부모밖에 접할 기회가 없고 가끔 얼굴을 대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저 용돈을 주시는 대상이 되어 가고 일방적인 ‘줌’의 상대일 뿐 사랑을 나누는 쌍방의 관계가 형성되는 기회가 박탈되어 버렸다.

내가 할아버지 머리를 깎는 그 정경을 지금도 머릿속에 그리면 그때의 애틋한 사랑이 온몸에 짜릿하게 전해온다. 지나간 시간에서 건져 올리는 추억의 보물이며 ‘라때’라 치부해 버리는 세대가 감히 넘보지 못하는 경지라 여겨진다. 그래서 내 가족이 함께한 내 어릴 때가 더 소중하다.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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