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쾌상 뚜껑을 열 때마다 할아버지께서 맡았을
묵향이 은은히 풍겨 나와
​​​​​​​생전 할아버지의 체취를 느끼는 듯 정답다

물질보다 정신영역에 간직된 기억이 더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신동화 명예교수의 살며 생각하며(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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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오래전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남긴 자취는 자손들의 머릿속, 가슴에 오래 남아있다. 그 영상이 눈에 보이는 물체와 연결되면 더욱 환히 추억과 연결된다. 우리집 거실에는 항상 눈에 보이는 장소에 고색창연한 쾌상과 함박지에 예술작품인 양 잘 감겨져 오랜 시간을 견딘 무명 꾸리가 있다. 아마도 각자 집 거실이나 창고 등 우리 주위에는 조상들이 남긴 유물들이 있겠지만, 나와 직접 관계가 있고 숨은 이야기가 얽혀 있는 물건을 간직하고 있으면 특별한 애착이 가는 것은 일반적인 생각이다.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는 그냥 좀 오래된 물건이구만 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대부분일 테지만, 그 물건에 내 추억이 담긴 경우에는 완전히 다른 감정이 배어났다. 
 
가끔 국립민속박물관에 간다. 전시품 중에는 우리 옛 조상들이 사용했거나 일반 생활 속에서 옆에 가까이에서 썼던 것도 있고, 실제로 몸에 걸쳤던 무명옷, 삼베옷이 있는가 하면 고무신이 나오기 전 나막신이나 짚신 등은 내가 직접 사용해봤거나 신고 생활한 적이 있으니 어찌 정감이 가지 않겠는가. 그 정황이 60~70년 전 일이고 내 성장 과정에서 내 곁에 있었고 내가 쓰던 물건들이니, 보는 것만으로도 아련한 추억 속으로 나를 끌고 간다. 근래 들어 시대가 너무 빠르게 바뀌다 보니 어제 것이 옛것이 되어버리는 시대에서 너무 멀었던 것을 들추는 것 자체가 호응을 받지 못하겠지만, 있었던 사실이 그 사실을 바탕으로 오늘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수용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이 든다. 
 
큰 비용을 들이고 시간을 들여 여러 지역에 민속박물관을 건립하고 운영하는 것은 단순히 옛것을 알리자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조상이 오래전에 사용했던 집기 등을 보면서 오늘의 변화상과 비교하고 조상 물건을 통하여 그들이 가졌던 얼을 같이 느끼고 앞으로 오는 새날을 맞는 내 자세를 다시 가다듬어 보자는 뜻이 담긴 것 아닐까 생각한다. 국가 차원에서 큰 비용을 들여 박물관을 운영하고 국민에게 관람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조상의 감춰진 정신유산을 통하여 민족의 자긍심을 불러일으키고 역사가 있는 자국민의 자존심을 북돋우기 위함이다. 이런 자산은 국가나 국민 전체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내 선조가 물려주신 유산은 어찌 보면 개인 영역으로 한정된다고 여겨진다.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쾌상은 고조할아버님이 쓰시던 것을 대를 이어받았다고 말씀하셨으니 가히 200년이 넘는 시간을 그 안에 품고 내가 지금 보고 있다. 아주 작은 쾌상, 서랍은 자그마한 것이나, 그 위에 한 칸이 별도로 있어 오래된 벼루가 들어있고 바로 옆에 먹과 붓을 넣게 되어있다. 가끔 쾌상 뚜껑을 열 때마다 할아버지께서 맡았을 묵향이 은은히 풍겨 나와 생전 할아버지의 체취를 느끼는 듯 정답다. 써주신 글은 보관하지 못하고 있지만, 할아버지께서 절기에 쓰셨던 입춘대길이나 건양다경의 문구는 지금도 머리에 있으니, 물질보다 정신영역에 간직된 기억이 더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한다. 
 
이 귀한 쾌상을 어린 손녀가 어느 날 뚜껑을 밟아서 두 동강 내버렸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다행히 결을 따라 쪼개져서 감쪽같이 붙여져 흉터는 없지만, 이제 이 쾌상을 볼 때는 할아버지와 손녀가 함께 묶여 생각이 난다. 오래된 쾌상에서 이런 생각을 떠올릴 수 있으니 이 또한 내 추억의 상자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 얘깃거리가 추가되었다. 
 
어머니가 손수 목화를 심고 실로 날아 만든 무명 꾸리는 어떤가. 어머니 세대가 젊었을 때는 농촌의 모든 생활은 극히 일부 품목을 제외하고는 자급자족이 원칙이었고, 그 중 농산물이 주된 생활 원천이었다. 쌀, 보리, 콩 등은 주식이었고, 생활에 필요한 의류는 무명이나 모시, 또는 삼베가 주류를 이루었다. 무명은 목화를 키워 솜을 얻고 이 솜으로 솜이불을 만들거나 실을 뽑아 이 실로 베틀에서 다양한 무명옷을 짜게 된다. 목화가 클 때 맺힌 여린 다래는 달큼한 맛으로 어린이들의 간식이었고 한 해의 농사이니 따먹는 것에 어른들의 지청구를 듣기도 하였다. 딸을 둔 부모는 시집갈 때 필수품인 신혼이불을 마련하기 위하여 솜을 두둑이 준비하고 날 잡아 넓게 펴놓고 고운 이불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때 딸이 잘살기를 마음속으로 비는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어찌 빠지겠는가. 딸이 시집가는 날 신혼 짐에는 정성 깃든 큰 이불 봇짐이 실리고, 그 모습이 선하여 지금도 이불 가게를 지날 때마다 어머나 생각이 난다. 

내 눈앞에 놓여있는 꾸리는 솜으로 꼬치를 만들고 이 꼬치를 물레를 돌려 실을 뽑고 기다랗게 뽑힌 실을 감은 타래가 되고 다시 타래를 갖다가 정성스레 되감기를 하여 꾸리가 된다. 꾸리는 무명베를 짤 때 북에 넣어 베틀에 올리면 무명천이 되어 나온다. 달가닥거리는 어머니의 베틀 소리가 이 순간에도 귀에 젖는다. 이런 추억이 있다는 것은 얼마만한 행복이랴. 어머니와 이 순간에도 베틀 소리로 교신할 수 있으니. 그 꾸리가 조금은 색깔이 바랬지만 원래 가진 모습으로 내 보물 함박지 안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 가슴 속 저 밑에 감춰져 있던 어머니 정성이 잊히지 않고 되살아난다.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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