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화 명예교수의 살며 생각하며(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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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제목은 누군가와 만났다가 헤어질 때 정답게 건네는 인사다. 내일이 다시 올 수 있고 또 그렇게 되리라는 믿음이 깔려있다. 내일은 미래이고 그 미래에 다시 만날 수 있는 희망을 품고 있다. 누구와 만나기로 하는 것은 그러려는 생각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는 것으로 희망을 맞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징표이다. 내일 만나자는 언약은 그런 마음일 것이다. 이렇게 희망을 간직한 인사일 수도 있고, 의사와는 다르게 스쳐 지나는 가벼운 말일 경우도 있으나, 진정성이 담긴 인사는 항상 정답다. 

우리 생활에서는 매일매일 혼자보다는 여러 사람을 만났다 헤어진다. 만나는 이유야 서로 같지 않고 다르겠지만, 헤어질 때 감정은 다시 만남을 기약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처지도 있을 것이다. 어릴 때 6년을 같은 초등학교에서 공부했던 옛 친구들, 기억에 남는 학교 졸업가에서 “우리 언제 다시 만나자”고 합창을 했는데, 200여 명 중 지금 이름이나 얼굴을 기억하는 수는 열 손가락도 다 채우지 못한다. 연락이 되고 있는 친구는 겨우 두세 명에 불과하다. 

전체 우리 일상의 생활에서 계속되는 어느 날 만나고 헤어짐을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고, 이런 만남과 헤어짐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가 헤어질 때 “내일 또 봬요”라는 인사가 있을 때 내일이라는 미래에 다른 만남을 기약하는 약속이니 무척 정답지 않은가, 좋아하는 애인 관계야 스스럼없이 아쉬움을 간직하면서 오늘 만남을 이어지는 다음 기회로 미루는 것은 당연하게만 우리 일반 사회에서는 다시 만날 약속을 하지 않는 한 그 만남을 기약할 수는 없다.

“내일 또 봬요”라는 인사의 내면에는 오늘 만남에 더해야 하는 아쉬움이 묻어나는 인사이기도 하다. 오늘 못다 한 것을 내일 다시 연결시키자는 약속이면서, 만남의 기회를 내일로 다시 이으려는 마음이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미래를 기약하고 상상하는 능력이다. 가장 가까이 존재하는 미래는 이 순간 다음이긴 하지만, 우리들의 일반적인 개념은 내일이고, 내일에서 다시 한 주, 한 달 그리고 다음 오는 새해이기도 하다. 

이런 생활의 흐름 속에 가장 가까이 있는, 태양이 새롭게 떠오르는 내일은 확실히 나에게 오는 앞날의 비침이다. 인류 역사는 여러 다른 사람을 만나고 협의하고 의견을 모아 협력하는 긴 여정이었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업무뿐만 아니라 만나서 때론 웃고 농담하면서도 할 일을 같이 이루어내는 속성은 결국 만남의 결과에서 오고, 만남에서만 협력이 가능하다. 이렇게 한 일은 내 혼자가 얻는 결과에 비하여 몇 배의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천부적인 능력이다.

우리의 삶은 늘 걱정과 근심, 이에 따른 고통이 같이하지만, 이들 어려움도 나 아닌 다른 사람과 만나 나누면 훨씬 가벼워지고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런 일들은 오늘 만나서 헤어지고, 다시 내일 얼굴을 맞대고 마음을 털어놓음으로써 아픔은 훨씬 잦아든다. 그래서 사람 간 만남은 큰 의미가 있다. 젊음에서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재력과 권력을 가진 특수한 경우 많은 대상이 꼬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한때, 갖고 있는 것이 떨어질 때 서서히 얼굴을 맞대고 얘기를 나눌 대상의 수는 줄어든다. 그럼에도 내 안에 희망이 있는 한 만나서 살아갈 의미를 공유하고 나름의 삶을 즐길 수 있다.

희망을 일절 꿈꿀 수 없는 곳이 지옥이다. 단테의 신곡, 지옥의 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고 한다.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희망이 없는 삶, 끔찍하다. “내일 봬요”라는 말은 같이 갖고 있는 희망을 나눌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만남을 뒤로하고 미래를 약속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지금과 함께 나에게 미래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즐거움이랴. 이 즐거움은 서로 만나 나눔으로써 그 총화는 훨씬 커지는 것을 느끼고 있다. 

좋은 일에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축하를 보내고 슬픈 일을 당했을 때 위로하고 아픈 마음을 나눔으로써 슬픔에서 쉽게 벗어날 수도 있다. 이런 일들은 서로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고, 내일이 나에게 있다는 희망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내일 봬요”는 혼자가 아닌 “같이”의 깊은 뜻을 품고 있다. 외로움의 시기, 코로나 팬데믹도 끝났다. 우리 더불어 함께해서 희망찬 내일을 같이 만들기를 바란다. 사회 분위기가 활력이 넘칠 것이다.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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