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화 명예교수의 살며 생각하며(222) 

우리 인간의 성장, 나무 가지치기의 정신과 닮아
어릴 때 교육은 잘못 뻗어 나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가지를 제거하고 
곧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주는가 하면
잘못된 판단 옳게 할 수 있도록 유도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나무의 가지치기 필요는 나무에 한정되지 않고 우리 성장 과정에서도 적용되는 원리라 여겨진다. 나뭇가지라는 물리적인 것과 그 뜻이 안고 있는 정신영역의 차이이다. 

과수원 주인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아 싱싱하고 탐스러운 과일을 선사했던 과실나무들이 초록의 향연을 멈추고 겨울 쉼의 계절에 접어들었다. 복숭아, 사과나무며 배가 주렁주렁 달렸던 가지가 앙상하게 민얼굴을 내밀고 있다. 담장에 얹혀있던 감나무도 탐스럽고 윤기 나는 큰 잎사귀는 색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못내 아쉬움을 안고 어미를 떠난다. 까치밥으로 남겨놓은 한, 두 알 감이 가을의 뒷자락을 보이고 있다. 우리와 함께하는 모든 나무가 상록수를 제외하고 옷 벗은 상태로 겨울을 나고 새봄을 맞을 준비를 할 것이다.

과수원 주인은 이들 과수를 겨울도 잘 보살피면서 봄을 맞아 나무에 물이 오르기 전 필수과정으로 가지치기를 할 것이다. 꽃눈과 성장 눈을 가리고 너무 촘촘히 뻗은 가지는 잘라내고 경쟁지를 제거하여 햇볕을 고루 받도록 배려하면서 필요한 가지와 꽃눈을 골라 남긴다. 과수의 가지치기는 상당한 지식과 경험이 있어야 바라는 나무의 틀을 잡고 가을 수확이 풍성하다. 전지는 순전히 인간의 기준에서 판단하는 것이다. 희망하는 목적에 맞게 나무를 관리하는 방법이고 나무의 의지와는 전면 상관이 없을 것이다. 어찌 보면 나무는 결코 희망하지 않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자기의 몸이 잘려나가는데 어찌 환영하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는가. 인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인간만의 필요에 의한 것이다. 

가지치기의 백미는 아마도 도로 옆에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플라타너스가 아닌가 한다. 봄, 여름에 무성하게 잎사귀를 냈던 사방으로 뻗은 가지가 풍성하다. 이 가지들을 그대로 놓아두면 옆에 같이 서 있는 전선을 건드리고, 더욱 어려운 것은 여름에 시시때때로 닥치는 비, 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는 불상사를 겪는다. 가로수 하나가 쓰러지면 큰 피해가 난다. 교통은 물론이고 주위에서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가지치기는 유독 인간과 같이 살고 있는 범위 내에서 자라는 나무에서 일어나는 인위적인 행동이다. 울창한 숲속, 스스로 자기를 키우고 있는 나무는 누가 가지치기를 할 것인가. 낙락장송은 자기가 자신을 관리하여 수형을 만들고 천년을 견디며 산다. 내가 사랑하는 나무, 느티나무는 어떠한가. 어떤 손질을 주지 않아도 스스로 자기 모양을 잡고 가지가 뻗어 나갈 때 햇볕을 고루 받을 수 있도록 방향을 정한다. 섣부르게 느티나무에 톱을 대면 수형을 망치기 딱 맞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관리함으로써 천년을 넘게 자라면서 우람한 나무로 성장할 수 있다. 은행나무도 스스로 수형을 갖춰간다. 

그러나 과수는 다르다. 한해라도 전지를 하지 않으면 성장가지만을 무성히 길러내어 결국은 몇 년을 견디지 못하고 생명을 다하게 된다. 폐원에 남아있는 과수의 초라한 모습은 관리하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마지막 모습이다. 물론 인간에게 순화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결코 지금 과수원의 나무 같지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 야생의 성질을 발휘하여 자기가 자신을 관리하여 오늘까지 존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야생을 벗어나 인간에게 순화되면서 결국 야성을 잃어버리고 인간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하는 상태로 변해버렸다.

과수의 경우가 인간에게 의지하면서 자생력을 잃은 대표적인 예이긴 하지만 야생성이 강한 플라타너스는 계속하여 잘라내고 다듬어도 어떻게든 싹을 다시 내고 때가 되면 힘차게 가지를 뻗는다. 인간의 의지대로 결코 따르지 않겠다는 곧은 심사를 보이고 있다. 소나무는 어떤가. 물론 인간의 의지가 관여하는 분재와 정원수로 의도적으로 키우는 것 외에는 자연의 상태, 자기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는 인위적 관리보다는 나름의 자연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나무들을 선호하고 그들의 자연스러움을 사랑한다. 

우리 인간의 성장도 나무 가지치기의 정신과도 닮았다. 어릴 때 교육은 잘못 뻗어 나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가지를 제거하고 곧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주는가 하면 잘못된 판단을 옳게 할 수 있도록 유도해 주는 등, 나무 가지치기와 그 맥을 같이 한다. 교육은 인간의 야성을 순화시키는 과정이고 인간답게 인성을 갖추도록 유도하는 과정이다. 어찌 보면 필요 없다고 속단하는 본성을 억제하고 틀에 맞는 정형의 작품을 만들지 않나 하는 의문도 든다.

영화에 나오는 타잔은 인간이기보다는 밀림의 동물로 생존의 방법은 스스로 터득하고 있다. 순화된 인간과는 차이가 있다. 순화되지 않고 자기 본성에 따라 자라고 있는 느티나무와 같이 인간도 스스로 성장할 수 있게 환경을 만들어 주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너무 인위적인, 틀에 찍어놓은 모형화하는 세태에 한 번 반란을 일으키고 싶은 심정이다.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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