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화 명예교수의 살며 생각하며(217)

‘그냥’이 일상생활에 자리 잡으면
결코 이 세상은 앞으로 나갈 수 없으며
옳고 그름의 판단도 흐려지면서 사회는 혼란에...
‘일부러’ 내가 찾는 것을 얻으려는 노력과
옳은 것을 향하여 가려는 노력이 하나하나 모여졌을 때
사회와 국가는 발전하고 옳은 방향으로...

일상 우리가 하는 행동이나 생각은 깊이 앞뒤를 따져 결정하는 경우와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스쳐 지나가듯 즉흥적으로 쉽게 마음을 정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중요하지 않거나 나와 크게 상관이 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그냥’ 지나치거나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러나 나에게 여러 면에서 영향을 미치거나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가볍게 그냥 넘어가지는 않는다. 나와 여러 상관이 있는 경우 일부러 시간을 내서 꼼꼼히 살피고 따져서 결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찌 보면 내 의지가 거의 없이 당시 상황과 시류에 따라 휩쓸려갈 때 그 이유를 물으면 ‘그냥’이란 답이 나오기도 한다. 의지가 없으니 딱히 지향하는 방향도 없다. 이 상황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상관하지도 않고 그것에 관심도 별로 없다. 시냇물 위에 바람 불어 떨어진 버드나무 잎처럼, 물 흘러가는 대로 맡기고 그 흐름에 내 움직임을 그냥 맡겨버린다. 나뭇잎은 주어진 상황을 내 의지대로 움직일 힘이 전연 없다. 

이와는 다르게 ‘일부러’는 확실한 목표나 지향 방향이 있을 때 정한 위치나 목표를 향하여 내가 할 행동을 한다. 강을 건너는 나룻배는 이쪽 강변에서 건너편으로 곧바로 가야 하고, 건너편도 아무데나가 아닌 정해진 나루에 닿아야 한다. 그러려면 거센 물흐름을 거슬리기도 하고 방향이 잘못되었을 때는 힘 있게 노를 저어 나룻배의 방향을 곧바로 잡으며 갈 길을 올바로 선택한다. 힘이 들고 어려움이 있지만 정해진 목표를 향한 꾸준한 노력이 뒷받침될 때 배는 건너편 나루에 안전하게 도착하고 자기 나룻배에 탔던 승객들을 무사히 목적지에 닿게 해준다. 이것은 ‘그냥’이 아닌 목표가 정해진 ‘일부러’가 작용하여 지향하는 지점에 이르는 과정이다.
 
지난 대선에서도 몇 사람의 특정 후보 지지자들에게 왜 그 사람을 지지하느냐는 질문을 했을 때 돌아오는 답변이 ‘그냥’이었다. 내가 물어본 이유는 정확한 지지의 참뜻을 알고 나도 그들의 생각을 참고삼아 더 깊은 토론의 기회를 얻고 싶었는데 그냥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을 때 당황스럽고 실망감이 밀려왔다. 물론 질문에 대답하기가 쉽지 않거나 속내를 밝히기 거북스럽게 느낄 수도 있을 것이라 여겨졌으나, 지금 닥친 상황을 폭넓게 판단할 수 있는 충분한 지식과 경륜을 갖춘 인사인 경우 실망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겪는 수많은 일에서 내 의지대로 되는 경우도 있으나, 전혀 뜻하지 않게 돌아가는 예를 많이 본다. 어찌 내 앞에 닥칠 일들이 내 뜻과 의지대로만 풀려 가겠는가. 내가 지향하고 바라는 대로 슬슬 풀린다면 살아가면서 무슨 고민이 있었을 것인가. 그러나 많은 경우 내가 바라는 것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원치 않은 결과에 이르는 것이 우리 삶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래서 이 세상을 고해라 했고 어려움을 빗대어 가시밭길이라 하지 않았는가. 

이 어려움을 이기고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그냥’과 ‘일부러’는 큰 차이가 있다. 그냥 물결치는 데로 놓아두는 경우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 ‘그냥’으로 놓아두었으니 그냥 굴러온 대로 얻은 결과물은 내가 자초한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러’는 확실한 내 의지가 있었고, 그 의지가 지향하는 목표로 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고, 그 과정에서 어려움도 있었지만 내가 할 수 있었던 온 힘을 쏟아 얻은 결과라면 나 스스로 받아들이는데 아쉬움이 없다. 그 어려운 올림픽 경기에 출전하여 최선을 다하여 뛰었는데도 메달 권에 들지 못하였어도, 소감을 물었을 때 내가 힘 쏟았던 만큼 모두 다 했으니 만족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메달을 딴 것보다 더 값진, 자기 노력의 결과에 만족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자기 의지의 결여로 ‘그냥’이 일상생활에 자리 잡으면 결코 이 세상은 앞으로 나갈 수가 없으며 옳고 그름의 판단도 흐려지면서 사회는 혼란에 빠진다. ‘일부러’ 내가 찾는 것을 얻으려는 노력과 옳은 것을 향하여 가려는 ‘일부러’의 피나는 노력이 하나하나 모여졌을 때, 사회와 국가는 발전하고 옳은 방향으로 자리 잡아가지 않을까 여겨진다. 물론 ‘일부러’의 목적이 자기 이익이나 영달만을 위한 것이라면 사회에 패악을 끼칠 수 있으나, 공익을 우선하고 서로를 이익되게 하려는 ‘일부러’라면 어찌 이사회와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우리에게 존경받는 지도자는 모두 ‘그냥’이 아니라 옳고 바른 일을 향하여 ‘일부러’ 자기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행동해온 선각자들이다. 옳은 의지로 ‘일부러’ 자기 일을 옳게 하려는 사람이 많은 사회가 되기를 기원한다.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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