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화 명예교수의 살며 생각하며(253) 

수천 년 이어왔던 우리의 정신적 전통, 하늘에 제사 지내면서 안녕을 빌었고 명절 때는 몇 달 전부터 준비한 정갈스러운 음식을 차려 놓고, 가용주로 써오던 제주(祭酒)로 잔을 채워 돌아가신 선조를 기리는 행사를 치렀다. 이때는 모든 대소가가 큰집에 모여 잔치 겸 안부를 묻고 조상의 음덕을 기리는 가족의 큰 행사였다. 큰집, 집이 커서가 아니라 장손의 집이었고 제사와 명절 행사를 당연히 장손 집인 큰집에서 가졌다. 우리 집이 장손 집안으로 대가족의 큰 행사를 항상 함께하였다. 설이나 추석에는 유과며 강정, 식혜, 그리고 조청을 빠뜨릴 수 없으니 한 달 전부터 어머니는 바쁘셨다. 밥을 널어 말려 튀김을 하고 유과를 만드는 일은 좀 복잡하나. 우선 식혜를 만들어 뭉근 불에 농축하여 걸쭉한 황금색의 조청은 보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돈다.

이런 여러 준비를 마치면 명절 며칠 전부터 유과 바탕을 만들고 닭 깃털로 만든 붓으로 조청을 튀긴 유과 바탕에 고루 바르고 준비한 매화(벼를 튀겨 만든 튀김)로 장식하면 어찌 예술 작품이 아니라고 할 것인가. 그 아름답던 유과의 모습이 선히 떠오른다. 설이나 추석 전날은 모든 가족이 모여 전을 부치고 고기를 대파와 엇갈리게 구어 산적을 만들고 들통에 찌면 그 맛을 당기는 냄새가 지금도 코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한 달여 준비한 제물은 정성스럽게 상에 진상하면 제를 올릴 준비가 끝난다. 이 제사의 주관은 장손이 맡고 동생들이나 작은 집 식구들은 옆에서 거든다. 이 모든 행사가 일정한 격식에 따라 엄숙하게 집행되었고 어린이들은 뛰어다니는 것을 극도로 말렸다. 이렇게 첫 술잔이 장손이 올리고 나면 순서대로 술을 올리고 절을 한다. 아마도 기억하기에 설이나 추석, 제상의 제물은 달랐지만 거의 같은 격식을 따랐다. 홍동백서도 따랐고, 메(밥) 위에 수저를 꽂는 방식도 일정한 격식을 갖추었다. 장손인 큰 형님은 그 전날 지방(초상의 성함을 한지에 쓴 것)을 정성을 다하여 붓 글자로 써서 상 맨 가운데 위쪽에 배치한다.

어찌 제사에 향이 빠질 수 있으랴, 아침 일찍 장작을 피워 만든 불을 화로에 담아 제상 앞에 놓고 준비한 향나무에서 얻은 향을 몇 조각 올려놓으면 푸르스름하게 피어오르는 향을 머금은 향연(香煙)이라니, 그 향이 너무나 그립다. 이렇게 설 제사가 끝나면 동네 어른들을 찾아가 새해인사를 드리고 차려주신 음식과 술을 조금씩 먹고 또 다른 어른을 뵈러 간다. 이렇게 돌다 보면 어른들은 붉게 취하기도 한다. 이어서 윷놀이 등 가족끼리의 행사가 진행된다.

잊지 못할 추억은 세뱃돈이다. 한동안 돌다 보면 두둑해진 주머니가 얼마나 알차게 느껴졌는지. 추석은 제사를 모시고 바로 이어 성묫길에 들어선다. 그렇다. 조상들이 잠들어 계시는 선산은 시간 있을 때 가끔 찾아가지만 추석의 성묘는 남다르다. 며칠 전 이미 벌초를 깨끗이 한 묘(墓)에 들어서면 증조부, 조부, 부모님과의 무언의 대화가 이루어진다. 각자가 자기의 마음으로 조상들과 대화하는 시간이다. 살아생전 모셨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와는 정다웠던 광경이 눈에 선하고 기쁘게 반기시는 듯하여 가슴이 따뜻해진다. 비록 묘만 흔적으로 남기셨지만 내 마음속 큰 자리를 차지하고 계신다는 것도 느낀다. 이것이 조상과 나를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강한 끈이라는 것을 느끼며 산다. 내가 있게 해준 분들, 그분들의 음덕으로 오늘도 내가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요즈음 상황은 어떤가. 명절 제사가 없어진 집안이 대부분이고 명절 연휴에는 공항이 붐비고 유원지는 발 디딜 틈이 없다. 조상을 생각하기보다 덤으로 찾아온 휴가에 온 정신이 빠져있다. 이제 조상에 대한 제사가 있는 것 자체를 잊어버린 세대다. 그 시대를 그리워하며 추억에 젖는 세대와 공존하면서 그때를 그리워하거나 관심도 없는 부류가 한 시대를 같이하고 있다.

종교적인 이유이건 자신들의 소신이건 명절 제사와 기본제사가 흔적으로 머릿속에만 남는 것은 아쉬움을 넘어 가슴이 서늘함을 느낀다. 이렇게 가슴 서늘함을 느끼는 세대도 머지않아 모두 스러질 테니 명절과 제사는 이제 역사서의 한쪽 구석에 기록으로만 남겨지게 될 것 같다. 어찌 우리 전통과 조상 섬김 정신의 집합체인 제사를 우상 숭배라 폄하할 것인가. 조상과의 정신적인 단절과 오랜 역사와 함께한 이 민족의 얼이 사라지는 것이 저리게 아쉽다.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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