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와 국가는 소외될 수 있는 생명체를 보호하며 
올바르고 곧게 성장하여 한 가정을 잘 꾸리도록 지원할 절대적인 의무가 있다
부모가 없는 이들에게 정서적 공백 메워 줄 제도적 장치 만들어 줘야

신동화 명예교수의 살며 생각하며(209)

“엄마 없이 살아봤어요?” 그냥 이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먹먹하고 허탈하며 나 자신이 한없는 무기력에 빠진다. 엄마 없는 나를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그 상황을 상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선생님 엄마 없이 살아봤어요?”란 말은 보육원에서 나와 사회생활을 하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한 젊은이의 절규였다. 조선일보 아무튼 주말(2022.9.30)에 상세한 내용이 있는데, 읽어가면서 너무나 충격을 받았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불행한 최후를 맞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더 가슴 저미는 내용은 이런 불행한 최후를 맞는 이들이 모두 돈이 없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서적인 이유,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는 외로움, 그 외로움을 달래줄 그 누구도 주위에 없었다는 안타까움이다. 이들에게 믿을 수 있는 어른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나를 포함한 이 나라 모든 어른에게 책임이 있다는 무언의 외침이다. 

진정 이런 사태에 대하여 이 사회 구성원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꼭 같이 고귀한 생명을 받아서 태어났는데, 어찌 이렇게 공평하지 않은 최후를 맞았을까? 더욱 장래가 창창한 젊은 나이에. 자식을 키워본 부모로서 자식에 대한 애착, 아마도 모두가 공감하겠지만, 조건 없는 사랑이 바탕에 있는 그 끌림의 감정은 어찌 글로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 이제 성장한 자식을 보면서 그런 애틋한 마음은 많이 가셨지만, 마음에 품었던 기억들은 지금도 전면 변함이 없다. 

내 딸애가 자기 딸을 키우고 돌보는 것을 보면 대를 이어서 나타나는 자식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느낀다. 엄마를 따르는 외손녀의 모습이란, 너무나 정답고 살뜰하다. 한시도 떨어져 있으려 하지 않고, 잠깐이라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 불안한 모습이 애처롭다. 금방 다시 만날 터인데 그 사이를 너무 길게 느끼나 보다. 그런 손녀가 가슴 가득 사랑으로 와 닿는다.

내 여동생이 낳은 조카, 그 애는 별명이 치마꼬리였다. 어디를 가든 엄마의 치마를 잡고 움직이는 모습에서 따와 별명이 되었다. 그 아들이 이제 커서 한 회사의 중요한 자리를 맡고 있으니, 그래도 엄마의 눈에는 치마꼬리 잡고 아장거리는 자식이 눈에 있겠지. 이런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참으로 불행한 우리의 이웃이 있다는 것에 죄스럽고 안타까운 마음을 가누기가 어렵다. 

내가 컸던 우리 가족, 20여 명이 함께한 대가족, 농사가 전체 소득원인 당시에 어머니는 가족 거느리고 농사짓느라 자식들 부양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었으나, 따뜻하고 애정 넘치는 눈빛은 나이 먹은 지금도 내 가슴에 남아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활력소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생각하면 대가족 속에서 나는 어찌 보면 한구석 작은 구성원에 지나지 않지만, 모든 가족의 따뜻함과 보살핌은 내가 성장하는 기본 자양분이었고 결코 소외되는 경우는 없었다. 특히 할머니의 무한한 사랑은 지금도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그때는 그냥 당연한 것으로 여겼지만 이런 사랑을 받지 못하고 혼자서 자신만으로 외롭게 생활해 온 보육원 어린이나 청년들, 이들을 이 사회는 과연 사랑으로 보듬어 안을 수 있는 아량은 없는지.

혈연관계를 최우선으로 하는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입양제도가 활성화되어 부모 잃은 애들이 제2의 가정을 갖고 옳고 바르게 성장하여 사회의 유능한 일꾼이 된 경우를 자주 본다. 왜 우리는 이런 좋은 제도를 사회통념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받은 생명은 너무나 고귀하고 또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아서는 아니 된다. 이 사회와 국가는 소외될 수 있는 이들 생명체를 보호하며 올바르고 곧게 성장하여 한 가정을 잘 꾸리도록 지원할 절대적인 의무가 있다. 더욱 부모가 없는 이들에게 정서적 공백을 메워 줄 제도적 장치를 확실히 만들어 주어야 할 무한 책임이 있다. 

지금에 이르러 생각한다. 내가 누렸던 우리 가족의 보살핌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은 물론 모든 가족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지면서 내가 누린 이 혜택이 주위에도 번져 나가도록 나부터 행동으로 옮겨야 하지 않을는지. 전체 사회운동화하여 더는 보육원을 거쳐 나온 우리의 젊은이들이 외로움에 지쳐 창창한 앞날을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 세계 경제 대국은 물질만이 기준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정신적으로 인간다운 기본바탕을 갖추어야 선진국이 된다. 더불어 같이하는 우리 사회를 기대해 본다.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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