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고향을 갔을 때 접하는 생소한 환경
내가 놀았던 그 큰 당산나무와 졸졸 흐르던 작은 개울 등 
정든 자취가 깡그리 없어져 버리고 낯선 풍경이 되었을 때의 이질감
그것들이 겹치면 옛 사진의 모습과 겹쳐 더 생소해진다

신동화 명예교수의 살며 생각하며(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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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부모 없이 태어난 사람은 있을 수 없다. 그 부모가 나를 키워준 고향, 모든 것이 낯익고 친숙한, 내 마음속 넓은 여백을 차지해 왔던 내 의지처가 있다는 것에 늘 감사하며 살아왔다. 지금도 고향집 안채와 바깥채가 엇 빗겨 정답게 자리 잡은 모습이 머리에 떠오르고, 겨울철 따뜻한 안방에 온 가족이 모여 매일 밤 야식을 겸하며 이야기꽃을 피우던 기억이 생생하다. 윤기가 반짝거리는 큰방마루는 우리들의 뜀터와 놀이터이고 건넛방은 분가 나간 작은 아버지들의 신혼방 구실을 이어서 해왔다.
 
마당에 장독대는 어머니의 정성이 듬뿍 담긴 100년이 넘는 오래된 간장독을 포함하여 우리집 상징이 되었고, 그 옆에 어머니께서 매년 심어놓은 맨드라미의 붉은색은 우리 모두가 여름철 제철 꽃으로 눈길이 가곤 했다. 농사에 필요한 농기구를 넣어 놓거나 멍석이 쉬는 장소인 헛간은 그 용도에 걸맞지 않게 우리가 그네를 매는데 안성맞춤이었고, 추수가 끝난 후 짚단을 쌓아 놓은 장소로, 우리의 놀이터가 되곤 하였다. 한여름 더위에 지치면 훌쩍 뛰어나가 항상 우리를 맞아주는 냇가로 가면 어찌 여름의 더위가 거기까지 쫒아오겠는가. 

이렇게 지나다 보면 논에는 나락이삭이 힘차게 올라오기 시작하고 게 추어 놓은 물길에는 송사리가 떼 지어 몰려다닌다. 졸졸 흐르는 논둑길 도랑은 벼를 키우고 남은 물을 내보내고 또 다른 새 물을 받아들이고 있다. 벼꽃이 자기 책임을 다한 꽃술이 떨어지면 개구리는 제철을 만난 듯 포식하는 기회가 된다. 이때 어찌 메뚜기를 빼놓을 수 있으랴. 어린 벼에는 시기가 맞지 않아 눈에 보이지 않으나 나락의 모가지가 나올 때부터는 제철을 만나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몸집을 키우고 항상 움직이는 두 쌍의 더듬이와 양쪽에 있는 겹눈은 우리를 신비의 세계로 끌고 간다. 어찌 메뚜기뿐이겠는가. 잔디에는 풀무치가 자리 잡고 있고, 왕치(방아깨비)와 독특한 소리에 어울리는 때때시(방아깨비 수놈)는 다음 세대를 위하여 서로 만남의 기회를 마련한다. 

풀 뜰에는 봄부터 정성 들여 가꿔놓았던 호박넝쿨이 제철을 만나 무성하고 아침 햇살에 꽃을 피우면 어찌 벌이 오지 않겠는가. 크기가 보통 꿀벌의 몇 배인 호박벌은 그 이름에 어울리게 호박꽃에서만 꿀을 딴다. 자세히 보면 이 녀석의 모든 가는 털에는 꽃가루가 잔뜩 묻혀 있고 꿀을 준 대가로 가루받이의 매파 역할을 톡톡히 한다.

한쪽에 별도로 심어놓은 참외와 수박은 여름 한 철 더위를 식히는 과일로 군침을 돌게 한다. 이 모든 것이 우리와 함께한 고향, 그 속에서 생활하고 나를 키웠던 그 정든 모습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대나무를 엮어 만든 지지대에 포도 덩굴을 올리고 봄부터 줄기를 다듬고 새로 나는 순의 갈 길을 정해 주면서 정성을 들이면 8월부터는 청포도가 맺혀 실하게 크기 시작하고 조금 지나면 색을 달리하면서 내가 익었다는 것을 알린다. 그 포도 덩굴 밑에 평상을 놓고 포도송이를 감상하는 그 모습이 어제 일인 듯 눈에 잡힌다.

농촌에서 하루는 길게 느낀다. 여름의 뙤약볕도 시간을 늦게 가게 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예고 없이 시원하게 지나가는 소나기는 잠깐 모든 것을 멈추게 하는 마력이 있다. 하루가 나이 먹은 지금보다 훨씬 길었다고 느끼는 것은 나만의 생각이려는가. 지금도 고향을 생각하면 서두르는 것보다 모든 것이 여유가 있고 풍성했던 것으로 스스로 느낀다. 마음에서 오는 풍요로움이다.

자, 이제 이들 모두가 과거 시간에 묻혀버렸다. 다시는 내 현실로 나타나지 않을, 잊힌, 그러나 절대 사라지지 않는 마음속 영상, 세월에 바라졌고 결코 놓아버리지 못하고 함께 끌고 갈 영상이 이제 오래되어 변색된 사진을 보듯 흐려 지지면서 전에 느꼈던 감흥이 조금씩 엷어지는 서글픔에 젖는다.

기억의 쇠퇴라기보다는 오랜만에 고향을 갔을 때 접하는 생소한 환경과 내가 놀았던 그 큰 당산나무와 졸졸 흐르던 작은 개울 등 정든 자취가 깡그리 없어져 버리고 낯선 풍경이 되었을 때의 이질감, 그것들이 겹치면 옛 사진의 모습과 겹쳐 더 생소해진다. 이런 마음의 괴리를 더 느끼지 않기 위하여 고향 방문은 더 이상 기다려지는 행사가 아니다. 그냥 이제껏 가지고 있던 마음속 영상을 더 이상 손상시키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고 싶은 심정, 어찌 보면 내 영원한 마음의 쉼터가 서서히 흐려지는 아쉬움을 느끼는 나이가 되었나 보다.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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