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화 명예교수의 살며 생각하며 (340)
어릴 적 내가 성장기를 함께한 시골 마을, 고샅길은 아늑하게 둘러쳐진 나무 울타리가 이어져 있었다. 동내에서 멀지 않은 야산에서 가늘고 길게 자란 나뭇가지를 꺾어 와 엮거나 혹은 대나무를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 만든 나무 울타리는 마을의 풍경과 조화를 이루며 자연스럽고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이 울타리에는 듬성듬성 쥐똥나무나 회양목, 개나리, 측백나무를 섞어 심어 죽은 나무와 산 나무가 조화를 이루게 배치하였다. 울타리 밑으로는 스스로 오랑캐꽃, 민들레 등이 철 따라 자라 꽃이 피고 이들이 제철을 친절히 알려준다. 나무 울타리 틈 사이로는 집 안에서 노는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곤 했다.
울타리는 단순히 경계를 나누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소통과 교류를 가능하게 해주는 따뜻한 매개체였다. 또한, 촘촘하게 엮은 것이 아니라 좀 엉성하게 이어져 틈새로 안을 볼 수 있었다. 개는 이사이를 비집어 제 통로를 만들어 편리한 개구멍을 만들기도 하는 여유로움이 있었다.
나무 울타리는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만들어진 만큼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서서히 삭아 간다. 하지만 그 모습이 쇠락해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세월의 흔적이 쌓이면서 더욱 정겨운 자태를 띠었다. 비바람에 노출되어 색이 바래고, 일부는 조금씩 부서지기도 했지만, 그러한 변화조차도 자연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때로는 바람이 거세게 불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기도 했지만, 그 소리마저도 마을의 고즈넉한 정취 속에서 조용한 운율처럼 들려왔다. 만약 울타리가 무너진다면, 마을 사람들은 기꺼이 힘을 모아 다시 세우고 손보며 서로의 정을 나누었다. 그렇게 나무 울타리는 단순한 경계를 넘어 사람들의 삶을 잇는 다리이자 마을의 정서를 닮은 존재로 자리 잡고 있었다. 구획을 나누면서도 부드럽고, 배척하지 않는, 서로를 배려하는 그 모습은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따뜻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높은 콘크리트 담장이 길게 이어지며 경계를 단단히 구획 짓고, 집마다 무거운 철문이 단단히 닫혀 있다. 도시의 담장은 강한 차단과 거부를 상징한다. 불필요한 침입을 막고 사생활을 보호하는 데에는 효과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 사이의 소통을 단절시키고 서로의 마음소통을 막는 단단한 벽이 되기도 한다.
도시에서는 이웃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더 나아가서 알 필요도 느끼지 못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울타리 너머로 이웃과 눈을 맞추고 인사를 나누던 시골과는 달리, 도시에서는 높은 벽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차갑게 만든다.
그렇게 담장은 사는 사람을 보호하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멀어지게 하는 이중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덕수궁 돌담길은 정취를 불러일으키지만, 그 담장 밑을 거닐면서 단절 외에 사람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가. 글쎄다.
물론 시대가 변하고 생활 방식이 바뀌면서 울타리와 담의 기능도 달라졌다. 개인의 공간을 보호해야 하는 필요성이 커졌고, 안전에 대한 인식이 더욱 강조되면서 단단한 담장이 늘어났다. 하지만 때때로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나무 울타리의 따뜻함을 너무 쉽게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울타리 밑에서 때맞춰 스스로 피어나던 작은 들꽃처럼, 우리의 삶에도 서로를 향한 작은 틈새가 필요하지 않을까? 너무 높은 담장으로 모든 것을 차단하는 것보다, 적당한 틈을 통해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여유가 더 필요한 시대, 나만의 헛된 바람이라도 그냥 마음속에 품어본다.
우리는 서로를 보호하면서도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의 울타리를 만들 필요가 있는 세태이어야 한다. 물리적인 경계를 만들면서도, 그 안에서 관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공간을 남겨두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사람 간 소통이며, 함께 살아가는 방식일 것이다.
언젠가 다시 한적한 시골길을 거닐며 나무 울타리를 마주하고 그 앞에서 지나가는 정든 이웃과 따뜻한 미소를 나누고, 정겨운 인사를 주고받을 기회가 있을까.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도 우리 마음속에라도 다시금 따뜻한 울타리가 서로 자리 잡을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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