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화 명예교수의 살며 생각하며 (52)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나만이 간직한 유형무형의 보물
나를 있게 하는 또 다른 ‘나’

[식품저널] 출근하는 골목길에 잘 꾸민 아담한 카페가 있다. 들어가 음료를 마신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베란다 앞에 각종 화초와 키가 크지 않은 나무를 화분에 심어 아담하면서 울창한 숲을 만들어 놓았다. 팔손이며 주목과 동백이 있고, 명자는 꽃을 피우고 측백나무는 일 년 내내 푸름을 간직하고 있다. 가끔은 제라늄 꽃 화분이 놓인다. 화분에 심은 무화과는 초가을에 접어들면 초록의 작은 솔방울만한 열매가 진한 갈색으로 변하여 자기가 익었음을 알린다. 먹음직스럽다.

카페 주인은 아침 일찍 나와 화분에 정성껏 물을 준다. 아마도 자기만의 대화가 오고 갈 것이다. 어쩌다 나와 눈길이 마주치면, 일상적인 인사를 하며 가꿔놓은 작은 숲을 즐긴다는 감사를 드린다. 어느 날인가 꼭 물어 보고 싶은 사연이 생겼다. 몇 년째 한 쪽 구석에, 나름대로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화분에 심어놓은 나무가 죽어 있다. 꽤 지났는데도 그 모습 그대로 한 쪽에 머물러 있다. 다른 화분은 매년 새롭게 싹을 내고 조금씩 자라는데, 죽은 나무 화분은 처음 모습 그대로다.

궁금증이 생겨 하루는 감사의 인사를 하면서 죽은 나무 사연을 물어보았다. 너무 오래 정들어 키우고 대화를 나눴던 나무인데, 어느 날 생명을 다했다고 그냥 버릴 수가 없어서 그 모습대로 품고 있다는 얘기다. 쓸쓸할까봐 꼬마전구를 쭉 매달아 놓았다. 늦은 시간에 지나다보면 반짝거리는 불빛이, 비록 메말라 죽었지만, 나무와 서로 정담을 나누고 있는 듯이 느낀다. 내가 정을 주었던 대상이 생명을 다했다고 하여 그 정을 떼지 못하고 몇 년을 간직하고 있는 주인의 심정이 찡하게 전해온다.

우리 모두는 생명체는 물론이고 무생명체에도 큰 애착과 애틋한 정을 느껴, 꽤 오랫동안 간직하고 보면서 추억에 젖고, 때론 그 촉감을 느끼면서 교감한다. 한 때 영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올 때 그 지역에서 유명한 조그마한 동전 가죽지갑을 하나 샀다. 아래 주머니에 쉽게 들어가고, 동전이 필요할 때 뚜껑을 열어 쉽게 찾아 사용했다. 몇 년 썼더니 한 쪽은 벗겨지고 헐거워졌으나 내 분신이 되었다. 어느 날 만원버스 속에서 어찌하여 이 동전 지갑만이 없어졌다. 한동안 잃어버린 아쉬움에 바지 주머니를 무의식적으로 만져 보기도 했다.

카페 주인도 이미 죽은 나무이긴 하지만, 그 나무를 자기 집에 입양한 사연이 있는 것이다. 친한 친구가 선물했다든지, 혹은 여행을 갔다가 눈에 띄어 조심스레 담고 와서, 이 카페 밖에 자리 잡게 하고 길러왔을 것이다. 그 나무를 볼 때마다 처음 만나고 정들었던 이야기가 풀려 나오고, 그 옛날로 돌아가는 즐거움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설혹 죽었다 해도 자기 머릿속에는 추억이 있고, 나만이 간직한 이야기까지 버리고 싶지 않아 선뜻 없애지 못하고 있나보다. 애틋하다.

살다보면 우리 삶에도 도저히 잊지 못할 추억이 담긴 물건이 있는가 하면, 이야기의 줄거리가 머릿속에 담겨 잇는 사연이 있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공감하거나 같이 나눌 수 없는, 나만의 마음 속 대화의 상대, 그 속에 감춰진 내가 투영돼 즐거움을 주기도 하나, 아쉬움 혹은 안타까움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내 거실에는 어머니가 쓰시던 베틀과 함께 있어야 하는 보디집과 색 바랜 무명 꾸러기가 고이 간직돼 있다. 이들을 보면 나만이 들리는, 베틀에서 달가닥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수십 년 전 어머님이 그때 그 모습대로 투영돼 나를 반긴다. 이들 물건은 다른 사람에게는 하찮은 옛 것이지만, 나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추억의 샘이요, 어머님을 만나는 통로가 된다. 아마도 옛 조상의 물건을 수집하고 보존하면서 우리에게 무언의 교훈을 주는 골동품도 그런 심정으로 모으고 간직할 것이다.

우리가 사는 것은 재물과 먹는 것 그리고 자식들, 이들만이 모두는 아니다. 나만이 간직하고 소중하게 보존하고 있는 유형무형의 보물도 나를 있게 하는 또 다른 ‘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짐승과 다른 모양이다.  오늘은 거의 매일 지나는 카페에 들러 맥주 컵을 놓고 주인에게 죽은 나무에 얽힌, 숨겨진 이야기를 듣고 싶다.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 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식품저널 foodnews를 만나세요. 구독하기 클릭

저작권자 © 식품저널 foodnews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