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구
제주대 해양의생명과학부
석좌교수

가을비가 지나가고 도로엔 나뭇잎이 흩날린다. 여인네의 옷깃이 높아가고 따뜻함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가는 종이컵의 커피를 두 손으로 꼭 쥐면 따뜻함이 가슴으로 전해온다. 이른 아침의 서늘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한 모금의 커피를 마신다. 고속도로변의 한들거리는 분홍빛 코스모스 꽃이 다가오며 미소 짓는다. 그 미소엔 오랜 추억으로 간직된 많은 일들을 일깨워준다.

1. 쑥부쟁이 꽃피는 가을
설악으로 가는 고속도로변엔 하얗게 핀 쑥부쟁이 꽃이 한창이다. 차창에 스치는 꽃들이 눈에 들어온다. 산기슭엔 아직도 짙푸름을 유지하고 있지만 풀잎은 누런빛을 띄기 시작하였다. 지난 봄날 연초록의 풀잎이 짙푸름으로 변화되고 이젠 누런빛을 띄우고 있다. 젊은 연인들의 사랑이 성숙되어 가는 느낌이기도 하다. 짝을 찾아야할 남성들이 그들의 연인을 찾지 못하면 옆구리가 허전하다고 하는데 가을의 차가와지는 날씨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오늘 새벽부터 약간의 비가 내린 까닭에 설악으로 가는 길은 제체구간이 많지 않았다. 설악의 단풍이 절정으로 가는 이 때쯤이면 늘 붐비던 도로를 쉽게 달려서 한계령에 도착하였다. 산악회 버스에서 내려 한계령에 서서 멀리 내려다보았다. 이곳은 벌써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얼굴에 스치는 바람도 대단하였다. 내 마음도 가을을 닮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어느새 가을바람은 우리들 가까이 와 있다. 한계령에서 멀리 불타는 단풍을 내려다보는 어느 여인의 긴 머리가 바람에 훨훨 날리고 있었다. 한계령은 벌써 완연한 가을바람이 불고 있었다.

2. 산국의 향기 가득한 산길
한계령에서 삼거리까지 가파른 산길을 올라야한다. 하지만 오늘은 나 혼자 빨리 치고 올라갈 상황이 안 되었다. 산우인 청명님과 함께 올라가야하기 때문이다. 그는 은행 일을 하는데 한동안 바쁜 일로 산행을 하지 못해 잘 따라오질 못했다.

나는 때로는 앞으로 나가고 기다렸다 다시 함께 산길을 올랐다. 산길엔 하얗게 핀 산국(山菊)이 미소를 지으며 맞아주었다. 산국의 그윽한 향기를 맡으며 청명님을 기다렸다 함께 올랐다. 그는 경제 관련 서적을 2000여 권 읽은 경제에 밝은 사람이다. 세계 주요국가가 내년부터 실시한다는 베일인 제도에 대하여 설명을 들었다. 앞으로 경제 분야에 큰 변화가 올 것으로 예측된다.

이렇게 꾸준히 올라 첫 번째 봉우리인 끝청(1604m)에 올라섰다. 온통 돌밭 무더기인 이 자리에 서면 얼굴에 스치는 바람은 더욱 거세었다. 깊어가는 가을바람이라기보다는 만추의 바람에 가깝게 느껴진다. 으스스하게 약간의 추위를 느끼게 된다. 여기서 조금만 전진하면 중청(1676m)에 이르게 된다.

3. 대청봉으로 오르는 산길의 거센 바람
중청 대피소에서 대청봉까지 600m 정도로 멀지 않은 산길이다. 하지만 올라가는 산길은 쉽지 않았다. 얼마나 거센 바람인지 몸을 가누기가 쉽지 않았다. 어떤 부부 산객으로 보이는 분이 모자가 펜스 밖으로 날아갔다. 바로 앞에 보이는 모자를 포기하고 그냥 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나도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있었는데 하도 거센 바람에 모자를 벗어 손에 꼭 쥐고 갈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그렇게 추운 날이 아니었다. 대청봉의 거센 바람이 잠시만 서 있으면 추위를 느끼게 하였다. 거센 바람을 힘들게 뚫고 대청봉에 올라섰다. 하늘엔 뭉게구름이 흐르고 멀리 강릉 앞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사방을 둘러보니 크고 큰 설악의 단풍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4. 노란 숲속의 향기
대청봉에서 하산을 시작하였다. 내려가는 산길엔 노란 단풍의 숲길이다. 붉은 단풍이 불타는 젊은이라면 노란단풍은 온갖 세상풍파 겪어본 어른이다. 노란 숲속에는 성숙미가 있다. 이런 일 저런 일 다 겪어본 사람이다. 어느 철학자는 신이 다시 젊음을 돌려준다고 해도 이것저것 겪어본 지금이 좋다고 한다. 이순이 넘어야 인생을 조금 알기 때문이란다.
 
설악산의 노란 숲속에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꽃잎이 진 자리에 열매가 익어가듯
성숙미 넘치는 사랑도 눈을 뜨고 익어간다.
 
가을의 향기 가득한 산국(山菊)의 하얀 꽃엔
벌들이 찾아와 꿀을 따면서 윙윙거리고
노란 숲속의 힘차고 아름다운 축제를 펼친다.

설악폭포의 물소리 맑아지는 노란 숲속엔
석양에 반짝이는 구슬픈 노래도 울려 퍼지고
사랑스런 가을바람이 설악폭포의 힘찬 물줄기처럼 흐른다.
 
--- 시인 김현구, 설악의 노란 숲속에 부는 가을바람 ---

노란 숲속을 따라 내려오면 맑은 물소리가 들려온다. 설악폭포이다. 많은 비가 지나간 후라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는 더욱 더 힘차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성급한 나뭇잎이 떨어져 흐르는 물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이렇게 맑은 물에 하얀 손수건을 적셔보고 싶었다. 손끝에 전해오는 시원함으로 힘든 산행의 피로가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5. 가을향기 가득한 설악에서 띄우는 편지
설악폭포에서 오늘 산행의 종점인 오색으로 내려오면서 가을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 편지를 띄운다. 연인들은 사랑을 할 때 가장 행복하고 가수는 노래를 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들꽃은 누군가의 손을 타지 않고 들녘에 부는 바람을 맞이할 때 가장 행복하고 인간은 누군가의 사랑이 담긴 따뜻한 손길에 인도될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산사람은 깊고 깊은 숲속을 거닐 때 가장 행복하다. 작가는 글을 쓸 때 가장 큰 행복감을 느낀다. 나는 산사람이면서 작가의 길을 가고 있다. 노란 숲속의 가을날이 행복의 커피를 가져다준다. 따뜻한 커피의 종이컵을 두 손으로 꼭 쥐며 노란 숲속으로 달려간다. 계곡의 맑은 물소리와 노란 숲속의 추억을 삼키며 이 글을 쓰는 순간이 행복감으로 젖어들고 있다.

김현구
제주대 해양의생명과학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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