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희
한국식품연구원
대사기전연구단
선임연구원
김순희 한국식품연구원 대사기전연구단 선임연구원

식품을 다루거나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도 ‘후성유전’이라는 단어는 아직까지 낯설다. 식품과 유전학도 큰 관련이 없어 보이는데 유전에 무엇인가가 덧붙여진 후성유전이라니... 그런데 식품과 유전학은 큰 관련이 없을지라도 후성유전은 식품과 관련이 크다. 따라서 향후 식품 관계자들이 주목해서 살펴봐야 할 대목이다.

‘후성유전(後成遺傳, Epigenetics)’이란 유전자 즉, DNA 염기서열의 변화가 없음에도 불구, 노출된 환경에 따라 유전자의 발현 정도가 달라져 자손에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후성유전학’이란 이를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그렇다면‘후성유전’이 식품을 다루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과거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던 때에 식품에 바라는 가장 중요한 기능은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과 같은 에너지를 제공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식품을 통해 영양을 제공받는 것이 전부가 아닌 비타민과 무기질 같은 미량의 필수영양소 섭취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필수영양소들도 충분히 충족되어도 활동량은 줄어 질환을 야기하며, 거기에 수명이 길어짐에 따라 나타나는 대사성질환을 비롯한 노화관련 질환 문제들이 심각하게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식품의 특정 성분들이 이러한 질환 예방이나 치료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기능성 식품들이 각광 받고 있다.

그런데 식품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항암제의 예를 보면, 똑같은 약을 먹었는데도 어떤 환자에게는 호전효과가 있지만 어떤 환자에게는 전혀 차도가 없는 현상들이 나타나면서 유전적 특성과 같은 개인차에 따라 약물의 반응성이 달라짐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약물뿐만이 아니라 기능성 식품의 효능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보고된다.

똑같이 오메가-3 지방산을 먹었는데 누구는 효과를 보고 누구는 효과를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유전적 특성이나 신진대사능을 파악한 후 자신에게 맞는 약이나 식품을 먹는 것이 좋겠다는 개인 맞춤형 치료나 개인 맞춤형 식품이 등장하고 있다. 아무리 좋은 약이나 식품도 나에게는 효과를 나타내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니 말이다.

왜 같은 식품을 섭취해도 개인차가 나타나는 것일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유전적 차이이다. 사람마다 유전자를 다르게 물려받았으니 개인차가 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런데 유전자의 차이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다. 쌍둥이는 똑같은 유전자를 받아 태어나지만 살아가는 환경이나 생활습관에 따라 모습이나 질환발생 정도가 전혀 다른 경우를 볼 수 있다. 암과 관련된 유전자가 밝혀지고 있지만 그런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암에 걸리는 것은 아니며, 건강한 생활습관으로 아예 발병하지 않거나 정도를 늦추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더욱 흥미로운 예는 꿀벌과 여왕벌이다. 두 종류의 벌은 같은 유충에서 만들어진다. 즉 동일한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는데 꽃가루와 꿀을 먹은 유충은 꿀벌이 되고 로열젤리를 먹은 유충은 여왕벌이 된다고 한다.

이처럼 유전자가 우리 삶을 장악하여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유전자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삶의 요인들이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할 수 있는데 바로 이것이 후성유전이다. 유전자 자체가 어떤 기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에서 만들어진 단백질이 질병을 일으키거나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므로 유전자에서 단백질이 만들어지는 것(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하는 것은 우리 삶의 질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어차피 유전자는 타고 나는 것이어서 내가 어떻게 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유전자의 발현은 내가 노력해서 조절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유전자의 발현에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인 것들은 환경, 식생활, 신체활동, 스트레스 등이다. 특히 식품은 우리가 날마다 먹고 하루에도 여러 번 먹는 것이므로 후성유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과거 영양학에서 “You are what you eat”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내가 먹는 것이 곧 나의 몸을 구성하므로 먹는 것이 곧 내가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후성유전에 의하면 내가 먹는 것이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여 나의 건강을 더 나빠지게도 더 좋아지게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내 자녀에게도 유전되어 자녀의 건강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지금 내가 무엇을 어떻게 먹는가 하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과거 먹을 것이 부족하여 배고팠던 시대에 낳은 자녀들은 비만이 되거나 당뇨에 걸릴 확률이 높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후성유전연구’는 2000년대 중반 이후 휴먼게놈프로젝트에서 유전자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한계에 부딪히면서 각광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은 완성된 학문이 아니며 계속 연구가 필요하고 성장해야 할 부분이다. 이러한 연구가 진행될수록 식품이 우리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확대될 것이며, 건강한 식생활의 중요성은 커질 것이다. 막연하게 잘 먹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것이 아닌 이를 뒷받침하는 과학적 근거들이 나오고 있다.

주간 식품저널 3월 11일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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