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규 박사의 분자생명건강학
 
‘녹색성장’을 위해선 이산화탄소가 필연적으로 요구되는데 ‘저탄소운동’을 한다고?
 

들어가면서

지구상에 펼쳐진 녹색은 생명의 존속을 위한 자연의 산물이다. 자연은 지구 생성의 진화조건에 의해 녹색으로 장식되었으며, 녹색성장은 동물의 발생과 진화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인류의 탐욕은 녹색환경 파괴를 일으켜 인류에게 재앙을 가져오고 지구의 안녕마저 위태롭게 하고 있다. 자연은 인류가 조정할 수 없는 유일한 대상으로 우주와 지구의 무한한 진화능력이 합쳐진 쓰나미 같은 超能은 간섭을 배제한다. 따라서 자연의 파괴는 인류의 능력으로는 복구하기 어렵다.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는 것만이 인류의 생존을 가능하게 할 뿐이다.

세상은 표현의 홍수로 인간의 두뇌를 어지럽게 한다. 제멋대로의 표현들은 뜬구름처럼 고정됨 없는 망상과 공상의 나래를 펴 너울거릴 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조차 헤아리기 어렵다. 진정한 표현은 인간의 오관을 자극해 접수가 가능해야 하고, 과학적 본성으로부터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무시이래로 망상과 공상 같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양 선동하여 모호와 혼돈의 어지러움을 유도하는 표현은 정신을 갈기갈기 찢는 낮은 想念이 될 뿐이다.

지구상의 인류는 무한한 경제 성장에 매료되어 있다. 그러나 욕망은 결코 만족을 충족할 수 없으며, 더 많은 욕구에 시달리게 했다. 46억 명에 이르는 인류는 지구상의 한정된 자원으로는 성장의 한계를 감지해야 하며, 디오니소스적인 향락에서 아폴론적인 절제와 존재성의 인식으로 자연과 함께하는 사상에 正念해야 한다. 자연은 물질의 세계이다. 물질의 생성과 소멸의 자연현상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않고서는 녹색성장, 녹색경영이라는 용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호한 녹색성장의 개념

최근에 녹색성장과 저탄소의 개념에 대한 인식이 모호함에도 이들의 용어를 전파하고 있는 것은 격세유전(隔世遺傳)과도 같다. 인간의 의식적 사고는 그의 본능에 의하여 인도되어 일정한 궤도 위를 달리도록 해야 하나 생명 보존에의 생리적 요구가 분명하게 지적되는 사항을 과학적인 이해와 접근방식이 분명하지 않은 가운데 추진하고자 한다는 것은 허공에 주먹질하는 것과 같다. 유럽의 모든 나라에서, 그리고 미국에서도 선진이라는 우월성을 가지고 즉흥적이고도 유머러스한 기분으로 멋대로 명칭이나 용어를 남용하고 있는 가운데 타 문화권에서는 생각 없이 멋진 뉘앙스로 받아들여 선진된 행위로 자위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용어의 해석은 민족과 문화에 따라 엄청난 차이를 나타낸다. 같은 개념일지라도 문화권에 따라 다른 눈으로, 다른 감각으로 느끼듯이 일정한 문법적 기능에는 생리적 가치 판단과 행위의 사념(思念)에 한계가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과학용어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녹색과 저탄소라는 용어에 있어 정의와 개념이 모호하다 보니 느끼는 이해마저 너울거린다.
녹색화와 이산화탄소와의 연계성은 끈끈하여 녹색성장을 위해서는 많은 이산화탄소가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탄소동화작용(carbon dioxide assimilation)을 연상해야 함에도 저탄소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모순성은 사유함을 더욱 출렁거리게 한다. 녹색성장과 저탄소를 논의하고 있는 내용들은 과학적인 상식과는 먼 개념으로 유도되고 있다. 흥미롭고 새로운 용어를 등장시킨다는 의미에서 제멋대로 등장하다 보니 개념부터 모호하다. 차라리 녹색의 의미가 다분히 함유되었고, 귀에 익은 새마을운동이라는 용어가 합당하지 않을까 싶다.

인간은 삶에서 자연과의 조화로움이 첫째이다. 이는 지구가 만들어 놓은 자연을 파괴 없이 유지하고자 하는 행위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물속인 인류가 권태를 느끼지 않고 편안함을 유지할 수 있는 자연은 녹색의 대지 위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환경이고, 녹색환경은 자연보존을 위한 기본조건이기에 녹색의 장려는 우리에게 절대적이다. 그럼에도 이산화탄소의 풍부함을 상징해야 하는 녹색경영에 저탄소란 비과학적인 용어를 삽입함은 탄소동화의 의미에 어지러움을 낳게 한다.

사회는 단순함을 복잡하게, 쉬운 것을 어렵게, 긴 것을 짧게, 짧은 것을 길게, 표현하여 혼란스럽게 선동한다. 과학에서 이 같은 표현은 허락하지 않으며, 자연법칙을 벗어나지 않는 철칙을 바탕으로 표현해야 함에도 과학과 연계된 용어를 형이상학적인 禪學도 아닌 애매함을 넘나드는 안개와 같은 수식어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하는 것은 염치없음이다. 유물론적인 과학을 다루고 있는 세계에서 형이상학적인 용어를 마구 사용하는 것은 목적의식의 결여로 치부된다.
 
아무리 은어가 난무하는 세대라고 할지라도 과학용어를 마구 수식한다는 것은 방향성 상실을 초래한다. 녹색성장과 저탄소라는 용어는 자연 친환경을 의미하는 앙리 룻소(Henri Rousseau: 1844- 1910)의 아포리즘을 연상케 하고, 인간이 무의식적 상태에서도 감지해 낼 수 있는 녹색환경을 미궁으로 유도하는 형식이 된다. 녹색운동은 건강한 사회를, 저 탄소는 근면을 부르짖는 느낌이 들게 한다. 자연의 환경은 이 시각에도 진화하고 있으니 진화에 적응되는 자연환경에도 싫증나지 않는 푸르름의 생태와 현대인들의 높은 소비성향을 탓하는 순수한 탄소로 이루어진 다이아몬드에 대한 갈망을 줄이자는 저탄소 운동은 방향성이 어긋난다.
 
이 같은 해석은 억지일 수도 있다 하겠으나 참뜻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비교해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겠는가? 친 녹색화와 친 환경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먼저 지구학과 지구생태학에 접근해야 하고, 저탄소란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면 과학적인 근거를 찾은 연후에 등용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지구의 창조는 우주의 도움으로 이루어 졌으며, 자체의 진화과정을 통하여 현존의 환경이 만들어 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쉼 없는 진화가 계속되고 있음을 간과하면 해결의 문을 찾을 수 없다. 지구의 생성은 태양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왔다는 설과 은하의 집적으로 인한 빅뱅(big bang)작용으로 생성되었다는 설이 압도적이고 보면, 지구가 태초부터 가지고 있던 원소들은 증가나 소멸됨이 없이 마그마(magma) 속에서의 혼돈상태에서 현재의 상태로 유도되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혼돈에서 안정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형성된 지구표면의 사물생성과 이미지가 어떻게 현재와 같이 되었는지는 과학적으로 추론은 하고는 있으나 그 이상은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각과 해양 및 대기의 변천과 더불어 생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역사는 지각이 형성된 암석을 주축으로 대기와의 접촉으로 인한 화학진화설이 등장하므로 점차 추론이 확인으로 이어지고 있다.
 
생물권은 주로 지상과 땅속이다. 지상에는 태양 에너지를 받아 광합성을 하면서 자라는 식물과 그것을 먹고 사는 동물들이 있다. 또 바다에도 마찬가지로 태양 에너지를 받아 자라는 식물 플랑크톤과 그것을 먹고 사는 물고기들도 같은 조건적 생물이다. 이들의 근원은 생명의 기전을 일으키는 에너지가 태양과 지구 중심에서 방사되는 방사선이다.

지구는 태초 6,000℃ 이상의 고온인 용암상태로부터 진화되었으나 100여 개의 원소들은 소멸됨 없이 혼돈으로부터 안정을 찾아 가면서 지구중력에 의해 표층은 가벼운 원소(light elements)로 덮어지고, 중심부는 무거운 원소(heavy elements)로 배열되는 가운데 기체들은 표층 밖으로 쫓겨나 대기(atmosphere)를 형성하게 되었다. 원소들은 안정을 위해 분자와 화합물을 이루었고, 6,000℃의 검붉은 열기는 원자들을 산소의 가차 없는 공격으로 산화물로 전이되어 수소는 산화수소(hydrogen oxide)인 수증기로, 탄소는 이산화탄소(carbon dioxide)인 가스를 형성하여 안정된 기체로 되면서, 불활성 기체(inert gas)인 질소는 이산화탄소와 더불어 중력의 영향에 따라 산소층의 상하로 밀려나 대기를 형성하게 된다.

-100∼-50℃되는 우주공간의 냉한은 산화수소인 수증기를 냉각하여 물을 만들어 높고 낮음으로 형성된 대지그릇에 담아 2/3가  되는 바다를 만들면서 지구를 둥근 형태로 만들게 된다. 이 같은 진행은 대기를 형성하게 되었고, 대기의 진화는 현존의 대기층을 형성하게 되어 약 78%의 질소(N2)와 약 21%의 산소(O2), 0.9%의 아르곤, 0.03%의 이산화탄소(CO2)와 미량의 헬륨(He), 네온(Ne), 크립톤(Kr), 제논(Xe), 라돈(Rn)과 오존(O3) 등의 구성비를 갖게 되었다.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대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78%와 21%, 0.9%와 0.03%의 질소와 산소, 아르곤과 이산화탄소이다. 이들이 생물권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질소원소와 산소원소 자체는 불안정하나 동질간의 분자를 형성하므로 안정성을 갖게 되고, 이산화탄소 기체는 탄소와 산소의 이질적 결합으로 안정을 찾게 된다. 그런데 아르곤 원소는 독존적인 안정성을, 질소와 이산화탄소는 분자가 되면서 산소산화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불활성기체가 된다.

태초의 대기층 조성은 현재와 같지 않았을 것이며,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존재비율이 정반대이었을 것이다. 이유는 불덩이였던 지구환경에서 산소는 탄소를 비롯한 대다수의 원소들을 산화하여 산화물로 전환하였기 때문에 산소의 존재비율은 零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산소는 100여 개의 원소들을 무차별의 殺身으로 산화물을 만들어 주므로 안정된 상태의 분자를 만들어 준 것이다. 식물세계가 펼쳐지기 이전, 식물이 탄소산화물인 이산화탄소를 먹어 치우기 이전에는 지구상에 산소는 희귀한 존재였다.
 
현재의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존재비율이 정반대이었을 것을 상상해야 녹색초원을 그려볼 수 있게 된다.
 
이글거리는 지구에서 탄소마저도 산소에 의해 이산화탄소를 생성하고, -100∼-50℃에서 산화수소인 수증기가 액화되어 거대분자(수소결합 hydrogen bond)인 물 분자를 형성하면서, 약 0.1%의 이산화탄소가 용해된 이산화탄산수(carbon dioxide water)인 탄산(carbonic acid)을 식물들이 흡수하여 태양과 지열에너지의 도움으로 탄수화물(carbohydrate)을 합성하여 발생과 성장의 과정을 갖게 된다.
 
이것이 이산화탄소를 식이로 하는 식물의 탄소동화작용(anabolism)이고, 산성체질을 갖추게 된 식물이 된다. 탄소동화작용의 起電力(start-switch)은 녹색 클로로필로 태양과 마그마의 방사선 에너지를 흡수하여 녹색성장(green growth)을 가능케 한 것이다. 결과 지구 1/3의 대지를 녹색으로 장식하게 된다. 대지의 녹색화는 이산화탄소의 공헌이고, 녹색화 과정에서 환원 발생된 산소는 동물을 탄생시키는 순환의 자연철칙을 낳게 된다. 이것이 자연 법칙이고, 우주철학의 발상이다.

그런데 녹색환경을 만들어 주는 이산화탄소의 존재비율을 낮추어야 온난화(greenhouse)를 방지할 수 있고, 생태계를 보존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이산화탄소의 저 감화 표기를 저탄소(low carbon or lower carbon)란 용어를 등장시키고 있으니 표현은 자유일 것이나 내재된 의미는 전혀 다르다. 탄소화합물(carbonic compound)은 지구 생명체인 식물과 동물의 구성성분으로 이용되고 있다. 탄소란 용어는 순수한 탄소를 지칭하는 것으로 최고의 귀금속으로 대우 받는 다이아몬드를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공업용인 활성탄소(active carbon)와 카본블랙(carbon black)도 탄소물질이다. 저탄소라는 의미는 다이아몬드나 활성탄소, 카본블랙, 흑연(graphite) 등을 지적하게 되는 것으로 대기와 지구온난화에는 관계가 없다. 低이산화탄소와 低탄소란 용어는 근본부터 차이가 엄청나다. 최근에 탄소가 갖는 검정색이 태양열을 많이 흡수해서 지상온도를 높여 온난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색체론도 제기하고 있으나, 이는 미시적으로 문제가 되지 못한다. 지구 온난화를 메탄가스의 증가에 치중하는 학자도 있으나 메탄가스(CH4 :분자량:16)는 탄소화합물의 발효과정에서 발생되는 것으로 비중이 질소(분자량: 28)보다도 가벼워 기류를 타고 대기의 상층부에 모이게 되고, 양적으로 미량이어서 온난화에는 영향을 미칠 수 없다.
 
문제는 저이산화탄소와 녹색성장이 반대의 조건으로 맞물린다는 것이다.

녹색성장을 위해서는 많은 양의 이산화탄소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녹색성장을 위해서는 녹색식물의 먹이인 이산화탄소가 풍부해야 한다. 그러기에 동물이 발생되기 이전의 지표는 무성한 식물세계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이산화탄소가 부족하면 녹색식물들은 기아에 허덕이는 현상이 일어나 枯色이 만연한 황색 내지 갈색으로 대지를 덮게 된다. 다음으로 이산화탄소가 온난화에 영향이 있는 것인지도 의문이 제기된다.
 
대기 구성 기체의 78%가 질소
 
앞서 지적했듯이 대기를 구성하고 있는 기체는 약 78%의 질소(N2), 약 21%의 산소(O2), 0.9%의 아르곤(Ar), 약 0.03%의 이산화탄소(CO2)이다. 이들은 지표로부터 10 km정도의 범위내의 대류권에 기체 각각의 무게에 따라 점유율이 분자량이 28인 질소가 약 78%, 분자량 32인  산소는 21%, 다음으로 0.9% 점유한 무게 40인 아르곤과 0.03%를 점유한 분자량 44의 이산화탄소가 무게에 따라 순서 있게 대지를 덮고 있다. 대류(convection layer)의 움직임이 없을 정도로 잔잔한 대기(atmosphere)일 때의 기체분포는 비중에 따라 확연한 층을 이룬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무게가 가장 무거워 지표 가까이를 덮게 된다. 보다 무거운 아질산(NO2, N2O)과 아황산(SO3)가스는 자극성이 강한 매연으로 비중이 46,44과 80으로 이산화탄소보다 낮은 층에 자리 잡게 된다. 따라서 지표가 낮은 장소일수록 매연을 심하게 느끼는 것은 매연의 구성성분인 아질산과 아황산이 다른 기체보다 무겁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현상을 그림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대기를 구성하고 있는 기체들이 자유자재로 혼재하면서 균일하게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돌이 바람에 휩쓸리지 않으며, 사막의 모래가 바람에 날리나 결국 대지를 덮고 말듯이 무게에 따라 지면에 깔리게 된다.
 
이산화탄소는 대지(지표로부터 0∼3m)와의 접촉성 기체, 다시 말해서 비중이 다른 기체에 비교하여 무겁지 아니었던들 녹색의 창출이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지표로부터 3m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이산화탄소의 열 흡수ㆍ보유로 온난화의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보다 깊이 생각할 일이다.
 
온난화를 지구 보다 지름이 69배나 되고, 잠시의 일식상태에서도 2∼4℃의 온도가 내려가는 강력한 태양열(태양 외각 온도 6,000℃)을 제쳐놓고 온난화의 책임을 이산화탄소에게 묻는 것은 어쩐지 어설픈 느낌을 갖게 한다. 우주과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듯이 앞으로 2억년 후에 태양의 외각 온도가 2억℃에 가까워진다는 가정을, 수소가 헬륨으로 융합하는 태양의 진화 프로세스(E=MC2)를 믿는다면 온난화 현상은 태양의 변화에 의존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태양신인 아폴로 신에게 기도해야 할 것이다. 지구 기온이 앞으로 섭씨 2도 이상 더 오르면 지구는 결국 파국을 맞을 수 있다는 상상이 헛된 것은 아닐 것이다.

녹색식물이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흡입하고, 태양 에너지를 흡수하여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大地 水에 이산화탄소가 용해된 탄산수(cabonic acid water)를 흡수하므로 성장한다는 인식으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따라서 동식물의 성장패턴은 식물은 산성조건에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산성체질생물로, 동물은 식물과 대치되는 알칼리체질로 분류되는 자연의 음양설이 자연법칙의 하나가 된다. 동물이 식물의 체질을 보존하며 성장의 주체성분으로 작용하는 탄산은 동물에게는 남성호르몬 분비의 저해를 일으키게 되는 것과 같이 산성물질은 단백질로 된 동물에게는 여러 가지 장해요인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식물이 생산성생물이라면 동물은 식물이 만들어 준 산물에 의존해야만 정상적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소비성생물에 해당된다.

동물은 식물과 같이 생산능력이 없다
동물은 식물과 같이 생산능력이 없기 때문에 살기 위해 식물위주의 식이를 선택해야 한다. 동물의 탐식은 원초적인 본능으로 보아야 하고, 이상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 동물이다.
 
아무리 고상한 인간일지라도 먹이를 앞에 놓고 점잔을 뺄 수 없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최근에는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도 젓가락이 선뜻 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과연, 먹어도 될 것인가가 문제이다. 그만큼 먹이에 대한 노이로제에 시달리고 있다. 이 같은 현실은 친환경적인 녹색을 갈망하게 되었고, 녹색성장을 위한 기술에 접근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이로써 친환경적이란 단어에 과학기술이 접목된 친환경적 과학기술이란 명제가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있다. 친환경이란 인공적이 아닌 자연환경을 의미하는 것이고, 인공적인 기술이 섞이지 않은 늘푸른 환경에서 생산된 농축수산물을 가리킨 것일 게다.

지구생명체는 우주의 진화와 더불어 탄생하였으며, 진화에 적응하지 못한 생명은 도태시키면서 자연은 현재에 이르렀다. 적응조건은 대기와 지표에 분포되어 있는 성분의 적정수준이고, 부족하거나 과잉상태는 생존에 위험을 초래한다.
 
대기와 지표성분의 변화는 신생과 사멸의 순환이 아닌 변천으로 이어진다. 시간은 존재를 선택하게 되고, 존재는 지구환경조건에 적응된 산물일 뿐이다. 이를 시간적 자연환경이라 하겠다. 그리고 자연은 시간에 따른 진화가 있을 뿐 인위적인 조정은 있을 수 없다.
 
현존재는 현 환경에 친화적인 존재들이다.

친화경이란 용어는 지구생명체가 발생하였고, 유지되어 왔던 과거의 환경을 지칭하고 있으나 시각적으로 많은 간극(間隙)을 가지고 경험해 왔다. 아마도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친환경적이란 의미는 100년 전의 환경, 즉 오염되지 않았고, 지구생명체가 지속적으로 건강할 수 있었던 산업사회가 배제된 자연환경을 의미하고 있을 게다. 결국 우리들이 바라는 녹색기술은 환경오염이 발생하지 않은 기술, 다시 말하면 지구생명체가 더 이상 진화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지속적인 환경의 기대함이다. 그러나 과학문명은 인류의 탐욕 때문에 급진전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문명 이전의 원시적인 세계로 되돌릴 수는 더더욱 없다. 현대철학의 핵심이 되고 있는 과학철학이 인류사상의 중앙에 놓이게 된 것은 그 만큼 인류문명에 대한 절실한 과제 때문일 것이다. 과학문명을 탓하는 것은 과학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남용과 오용에 있었고, 물질만능사상으로 인한 思惟의 부족함과 어리석고 미숙한 과학기술의 잘못된 개념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단편적인 환경과학자의 지식과 기술을 뛰어 넘는 광범위하고 전반적인 과학을 다룰 수 있는 학자들이 디오니소스적인 물질적 환락 중심이 아닌 환상에서 깨어난 이성과 질서, 검소를 중심으로 하는 아폴론적인 정신으로 동물의 아픔마저도 배려하는 과학기술이 창출되어야 한다.

우리는 첨단 과학기술이라는 디오니소스적인 환상에서 생태계의 악화를 쉼 없이 경험해 왔으며, 끊이지 않는 과학의 정치적 이용에 과학자들은 숨이 가파르다. 이를 어찌하랴! 진실은 혼란스러워졌고, 표현의 正道마저 난무해졌으니 과학의 진리 또한 이에 견딜 수 없어 무너지고 있다.
 
오직 권력에의 아첨, 대중의 힘에 의한 진리의 몰락은 엄청나게 쏟아지는 포스트모던 이론, 허무주의에 물들어진 갈피 잡을 수 없는 이론전쟁, 오직 재편에, 자기 입맛에 맞아야 하는 독불 행위, 모두는 인간을 위한 지구생태계를 위한 진리에서 멀어만 간다. 진리는 너와 나를 떠난 지구의 입장에 서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지 성 규
                                                                                             분자생명건강학자
                                                                                                  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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