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갖춰진 풍요 속에서 살면
원하는 것을 얻는 만족감은 결코 느낄 수 없을 것
신동화 명예교수의 살며 생각하며(182)
전북대 명예교수
식량이 태부족한 시절에 살았던 사람들은 ‘나 때’라고 치부되어도 먹는 것에 감회가 깊을 수밖에 없다. 한때 우리 주린 배를 채워주었던 칼국수에 대한 생각은 살아온 시대에 따라 감정이 조금씩은 다를 것이다. 비극의 6.25가 끝나고 먹고살기 어려웠을 때 미국이 무상 제공한 밀가루는 우리가 굶지 않고 끼니를 때울 수 있게 한 고마운, 중요한 식량원이었다.
잦은 홍수와 가뭄 그리고 병충해로 국내 생산 가능한 주식인 쌀은 태부족하고 겨우 보리로 연명하였으나 보리마저도 충분치 않아 식량 기근은 심각하였다. 이때 ‘보릿고개’라는 말이 굶주림의 상징으로 회자되었다. 남아있는 쌀은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익지 않았으니 하루하루 수확 가능한 날을 점치는 보리를 보는 심정이 어떠했을까.
이때 밀가루는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최고급 식재료였고 허기를 채우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하였다. 잘 정제된 미국산 밀가루가 들어오기 전 일반 가정에서는 통밀을 맷돌에 갈아 체로 쳐서 가루를 얻었고 이 거친 가루를 여러 용도로 사용하였다. 무상원조물자로 들어온 밀가루 포대에는 구호단체와 수혜자가 서로 악수하는 디자인이 인상적이었고, 그 모습이 지금도 머리에 남아있다.
어머니는 배급받은 밀가루로 여러 음식을 잘 만들어주셨다. 수제비는 물론이고 부침개며 쑥을 넣은 개떡도 별미였고, 특히 어린 호박잎 위에 밀가루 반죽을 부어 익힌 것은 별미로 쳤다. 여러 밀가루 음식 중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은 팥을 갈아 넣은 팥칼국수, 이것을 낭애(지역 말)라 했는데, 이 낭애의 맛이야말로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밀가루를 적당히 반죽하여 어느 정도 찰기를 갖게 되면 적당량을 떼어 내어 암반(떡판이라고도 한다)에 밀가루를 밑에 뿌리고 방망이로 살살 눌려 밀면서 넓게 핀다. 적당한 두께가 되면 몇 겹으로 접어 일정한 크기로 자르면 칼국수 발이 완성된다. 이 잘라진 칼국수 발을 털면서 끓는 물에 슬슬 뿌려 넣는다. 이 끓는 국물에 갓 따온 애호박을 채 썰어 넣고, 필요에 따라 감칠맛 나는 새우젓을 넣으면 칼국수가 완성된다.
물론 팥을 이용할 때는 먼저 팥을 삶고, 삶은 팥을 으깨어 대바구니에 치대면서 걸러 껍질을 빼내고, 이 액을 끓이고, 이 끓는 팥죽에 칼국수 발을 넣는다. 이 팥죽은 팥이 가지고 있는 약간의 단맛에, 여유가 있다면 설탕을 조금 넣으면 최상의 감칠맛 나는 팥칼국수가 된다. 물론 간을 맞추는 것을 잊으면 안되지만, 듬성듬성 구색을 갖춘 초록색의 애호박이 씹히는 그 연한 조직은 지금도 입안에서 군침이 돈다. 보통 앉은 자리에서 두 그릇은 뚝딱이다.
우리 식구에게는 글루텐 알레르기가 없어 밀가루가 건강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이 뜨거운 팥낭애를 시원한 대나무 평상에 앉아 높이 솟은 은은하고 넉넉한 보름달을 벗 삼아 허기를 채우는 정경은 지금 생각해도 정겹다. 더욱 백미는 저녁에 먹고 남은 팥낭애를 어머님은 장독대 시원한 곳에 놓으셨다. 이 남은 음식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사람의 차지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더 많이 차지한다는 속담이 여기에도 적용된다.
뜨거웠을 때 맛과 식어서 엉켜있는 낭애의 맛은 또 다르다. 뜨거울 때 칼국수 맛과 식었을 때 팥낭애는 완전히 촉감과 맛이 다르다. 뜨거울 때보다 단맛은 더하고 칼국수의 조직은 조금 흐무러졌으나 또 다른 부드러운 감촉이 다른 느낌을 준다. 이 걸쭉한 팥죽 낭애를 한 그릇 먹으면 아침으로 충분하다. 먹을 것이 풍족하며 배고픔을 알지 못하는 세대에게는 어찌 이 감정과 정경을 이해할 수 있으랴.
부족의 감정이 필요에 의해서 더 절실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모든 것이 갖춰진 풍요 속에서 사는 경우 원하는 것을 얻는 만족감과 흐뭇함은 결코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 어려운 시대를 살았던 우리 웃어른 세대에서 느껴졌던 먹을 것의 어려움, 인간의 본능에서 묻어나는 공포는 그 느낌이 어떠했을까 하는 저미는 아픔이 지금도 느껴온다. 이 가슴 조임은 나이 들어 느끼고 살아오면서 터득한 철들음이 아니겠는가. 팥칼국수(낭애)가 지금까지 머리 깊숙한 곳에 간직되어 그때를 회상하면 옛 추억에 젖어 드는 것도 그 살뜰한 경험이 없으면 어찌 느낄 수 있는 애틋한 감정이랴.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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