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담산책] 이 세상은 소풍길
신동화 명예교수의 살며 생각하며 (315)
유한한 생(生)을 받았으니, 아침 해가 떠서 서산에 걸리듯 언젠가 마무리를 하는 날이 오겠지. 나태주 시인의 글에서 “우리는 잠시 소풍을 나왔다가 돌아가는 사람들이다”라고 했는데 나 왔던 곳도, 돌아가는 장소도 모르니 어둠 속에서 헤매듯 그냥 주어진 삶을 시간에 얹혀 지나가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조용히, 일상의 하루를 맞으며 어느 날, 그 자연스러운 일상에서 벗어난 때를 위하여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지 않나 막연히 생각하는데 그 방법이 언뜻 떠오르지는 않는다. 전통시장 생닭 가게에 갇혀있는 닭의 신세처럼 언제 올지 모르는 내 차례를 눈 껌뻑이며 기다리는 모습, 그래서 조금 떨어져 먼발치에서 나를 응시하는 기회를 얻기도 한다.
그래 우리 현생의 삶이 소풍길이라는 것은 꼭 마음에 와닿는 표현이라 공감한다. 가끔 들떠서 소풍 가는 날을 기다리고 그날의 즐거운 행사를 기대에 차서 준비하는 모든 과정, 그 양상은 사람마다 달라도 비슷하지 않은가. 소풍 갈 때와 돌아올 때의 감정도 다르고 마무리하는 표현은 집단이나 종교, 개인에 따라 꽤 차이가 난다. 아마도 종교 분야에서 가장 의미 있는 여러 말로 그 뜻을 부여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불교에서는 몇 가지 심오한 뜻으로 에둘러 죽음을 설명한다. 가장 많이 통용되는 말이 열반, 타오르던 번뇌의 불꽃이 모두 사그라짐, 그래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번뇌에 고민하고 마음 태웠는가. 그 모든 어려움이 활활 타는 불꽃, 그리고 사그라지는 것 같이 얹어지니 얼마나 시원한 일인가. 그 경지를 어찌 마다할 수 있는가. 기다려진다. 입직(入直), 고요함에 드는 것 모든 잡사를 뒤로하고 바람 얹은 호수의 잔잔한 모습으로 되돌아가니 이 어찌 마다할 수 있으랴. 살면서 조용한 호수같이 평온했던 날이 얼마나 되는가. 그 평온, 고요함에 든다니 서둘러 그 경지로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해탈(解脫), 속박이나 굴레의 얽매임, 미련에서 벗어나서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 내 살면서 이런 마음의 상태를 즐긴 시간이 얼마나 될까. 해탈의 경지에 들어 이 고요함을 즐기는 것은 꽤 오래 내가 열망한 상태가 아닌가. 어찌 이 해탈의 상태를 마다할 이유가 있겠는가. 오늘 당장이라도 해탈하고 싶은데 그 절차가 있겠지.
기독교에서는 어떤가. “소천”한다고 한다. 그 말의 뜻은 하늘로 소환된다는 의미로 하느님께 부름을 받아 천국으로 간다는 뜻인데 우리는 어려움이 있을 때 하느님에게 빌고 축원한다. “그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부르는데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 당장 뛰어가고 싶구나. “안식(安息)에 들다”라는 말도 있다. 편안히 쉰다는 얘기, 복잡하고 서둘러야 뒤지지 않고 살아온 이 세상에서 잠잘 때를 빼고 언제 편안히 쉬어 본 경험이 있는가. 편안히 안식하고 싶다. 천주교에서는 선종에 든다고 한다. 우리 정신에 깃든 유교 사상에서는 별세라 한다. 이 세상을 떠나 다른 세상으로의 이동으로,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의미인데 평화롭게라는 말이 딱 마음에 든다.
살아오면서 내 마음에 평화가 깃든 적이 얼마나 있는가.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해 부모 걱정, 자식 뒷바라지, 직장에서의 갈등, 이 모든 것이 내 마음의 평화에 여울이 지게 만들었으나 이런 사람들에게 마음속에 평화가 깃든다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어서 그 평화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지금 생각하니 조금 걸리는 것은 윤회라고 얘기하는데 이생의 내 모든 행동이 내 생의 갈 길을 결정한다니 뒤돌아보면서 편안한 내 생을 잘 맞을 자신이 없어지니 이를 어쩌나. 이미 지나간 내 과거가 절대자에 의해서 선명히 기록되어 보존되어 있을 테니. 이제부터라도 착하고 선하게 그리고 참되게 살아야 할 터인데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그래도 10배쯤 열심히 하면 그 정성을 갸륵하게 여겨 윤회의 바퀴에서 빼주려는지.
종교적인 얘기이고 우리가 가장 많이 쓰고 있는 말은 “죽었다”고 한다. 그 말은 되 뇌여 보면 침침하고 어딘지 음침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죽음은 그렇게 피하고 싶은 대상인가 보다. 더욱 피부에 닿는 얘기는 “숟가락 놓았다.” 그렇다 먹지 않으니 삶의 종말은 확실한데 우리한테는 숟가락인데 동남아에는 아직도 손으로 밥을 먹는데 그분들은 손을 놓을 수 없으니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인가. 요사이 전쟁에서 상대국의 수장을 제거했다고 언론에서 발표한다. “제거” 필요 없어 없애버린다는 표현, 어찌 우리 귀하고 귀한 생명을 필요 없어 없애버린다고 표현하는가. 너무나 잔인하다고 역겨워지기도 한다. 죽음을 그렇게 표현하는가. 너무나 잔인하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죽음을 어떻게 표현하든 인간의 생명은 가장 존귀하고 어느 것과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창조의 결과이다. 생을 부여받은 것만으로도 위대하고 존귀하다. 이 생이 이어지는 한 어느 날 마무리하고 갈 때 완성된 삶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그래도 노력은 해야겠지.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