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담산책] 벽시계의 초침 지나는 시간
신동화 명예교수의 살며 생각하며 (312)
내 책상 앞에는 둥그런 모양의 초침과 분침 그리고 시간을 알려주는 회색빛 시계가 걸려있다. 근래 디지털이 일반화되어 있지만, 시계추(불알)가 덜렁거리고, 태엽을 감아 움직이게 하는 괘종시계는 꽤 오래 내 친구로 함께 생활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을 거역하지 못하고 노쇠하여 수리 불가로, 별수 없이 아쉬운 마음을 억누르고 마지막 운명을 지켜봤다. 지금 움직이는 벽에 걸린 시계는 거의 10년이 되었는데도 밥(배터리)을 주면 어김없이 정확한 시간, 분, 초를 알려주고 있다.
가끔 이 시계 얼굴 중 내가 신경 써서 보는 것은 초침이다. 전에는 약한 소리라도 있었는데 지금 것은 그냥 소리 없이 움직임을 계속한다. 가만히 초침을 따라가 본다. 정말 한순간도 멈칫하지 않고 움직임을 계속한다. 자기가 한 바퀴 돌면 분침은 한 칸을 움직인다. 어김이 없다. 이 초침에서 현재, 지금을 느낄 수 있는가. 없다. 그냥 연속되는 흐름 속에 내가 지금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은 바로 지나가 버린다. 시냇물의 흐름에서 내 순간을 찾으려 하다 그 순간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가 되는 것처럼. 진정 지금, 이 순간은 있는 것인가. 내가 느끼는 것은 이미 과거가 되었고 이어서 미래가 밀려와 있다. 우리는 단지 과거와 미래의 가운데 끼어서 흐름을 계속할 뿐이다. 잘 알려진 얘기로 “현재”, 이 순간을 살아라! 라고 얘기한다. 현재, 이 순간은 과연 어느 때인가. 시계의 초침을 보고 있으면 지금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지나감은 느낄 수 있으나 한 시점,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이 과거로 묻힌다면 지금, 이 순간, 시계의 초침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나를 따라와 보라 재촉하는 듯 보인다. 응시하다 분명 1분이 지나고 5분이 그냥 간다.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는 무엇을 했는가. 그 시간 동안 분명 나는 존재했는데 5분 전 나와 지금의 나는 동일한 인간인가. 그만큼 변했고 지금도 변해가는 과정이다.
정동진이 아니라도 이른 아침 일출 보기를 좋아한다. 처음 하늘을 환히 밝히는 태양의 떠오름, 동쪽 하늘이 붉은색으로 변하고 그 빛이 점점 진해지면서 태양이 손톱만큼 얼굴을 내밀다 쑥쑥 커진다. 이윽고 찬란한 햇빛이 온 누리에 골고루 뿌려진다. 보고 있는 한순간, 그 순간을 셈해본다. 정지된 시간이 아니라 연속된 여정이 오고 감을 한시도 멈추지 않는다.
다시 시계의 분침으로 돌아가면 이 순간도 계속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정한 공간을 지나는데 이 초침을 보고 있는 나는 과연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과거의 나인가, 미래에 오는 나를 보고 있는 것인가. 헷갈리는 데가 많다. 이렇게 지나가는 삶에서 희로애락이 항상 함께해 일순의 일로 감정이 바뀌고 그것으로 마음의 상태가 달라진다. 보고 있거나 겪고 있는 그 자체는 전혀 변화가 없는데도 느끼고 있는 내 감정의 차이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니 그 본체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본다. 그 “찰나”를 알기 위해서 선현들과 종교계에서도 정신수양을 계속하는 것이 아닐까. 일순도 멈춤이 없는 연속된 삶 속에서 많은 것이 일어나고 소멸하는 과정을 지금 보고 있다. 있다가 소멸하는 우주의 천리(天理)를 우리는 매 순간 접하고 있다. 순간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지금 내가 갖고 있고, 향유하는 것이 영원할 것처럼 행동하고 살아가는 것은 과거인가, 현재인가, 혹은 미래인가가 헷갈리는 순간의 연속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시계의 초침은 지금도 자기 역할을 다하면서 움직임을 멈출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 초침을 보고 있는 나는 지금 존재하는 것인가, 허상이 아닌가를 확인할 길이 없다. 마음먹기 따라서 달라진다고 했는데 그 마음은 일렁이는 바닷물처럼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변화를 거듭하고 있으니 어느 것이 참인가 하는 생각을 한다.
시계의 초침 위에 내 마음을 올려놓고 지나가는 시간, 그 세월을 그냥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명상이라고 하는가. 흔들리지 않는 참 나를 찾아가는 길이 쉽지는 않아 보인다. 지금도 변하고 있으니.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