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담산책] 우리의 삶에는 yes와 no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신동화 명예교수의 살며 생각하며 (311)

2025-06-04     식품저널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살다 보면 옳고 그름, 혹은 받아들일 수 있는 것(yes), 그럴 수 없는 것(no)을 이분법으로 결정하거나 그렇게 해 달라는 요구를 받는 때가 종종 있다. 다른 표현으로는 옳고 그름도 이 범주에 들 것이다. 일상에서 접하는 모든 일이 그렇게 쉽게 무 자르듯 결정 가능한 일이 얼마나 될까? 매일 겪는 일치고 딱 잘라 결정할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산다. 보통 yes와 no를 비유하여 흑(黑) 백(白)으로 말하기도 한다. 색깔이다.

이 흑과 백 사이에도 얼마나 많은 다른 색이 있는가. 대표적인 색깔이 두 색이 혼합된 회색이 있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중간색이고 조금 더 나눠보면 “희무끄럼하다”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또는 거무스름하다고 표현하여 회색의 정도에 또 다른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알린다. 푸른색은 어떤가. 푸르스름하다, 파랗다, 색이 혼합된 연두색 등등이 있는가 하면 기본 3색은 다른 대상과 혼합되면 보라색, 주황색, 초록색 등 또 다른 색깔로 변한다. 서슬 파란 국회의원들의 국정감사나 대정부 질문에서 하는 말, 길게 얘기하지 말고 예, 아니요로 대답하라고 윽박지른다. 국가의 중요한 정책이나 실행내용을 그렇게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가. 자기가 질문해놓고도 그렇게 간단히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질문자와 답변자가 바뀐다면 국민의 대표라는 그분들은 쉽게 yes, no를 간단히 대답할 수 있을까.

어찌 생각하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접하는 모든 일이 명쾌히 구분할 수 있으면 야 얼마나 단순하고 명확할 것인가. 검사나 판사의 일도 수 십 분의 일로 줄어들 것이고 이 세상 복잡한 일은 거의 없어지고 결과도 손쉽게 손에 쥐어질 것이다. 그렇게 안 된 이유가 무엇인가. 간단해 보이는 문제도 그 문제에 접한 개개인은 그 문제가 발생한 이유에 대하여 실뿌리 같은 여러 이유를 갖고 있다. 그 뿌리 중 하나하나가 그렇게 된 이유가 된다. 어찌 실뿌리 같은 문제를 yes나 no로 간단히 표현할 수 있겠는가.

yes나 no를 선과 악으로도 달리 표현하면 더 복잡하고 어려움에 빠진다. 인간 역사 속에서 옳고 그름을 선과 악으로만 구분하여 판단한 결과는 모두 실패했다. 선과 악의 구분은 과연 누구 기준에 따른 것인가.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선악은 극명하게 달라진다. 전쟁 중에도 적군의 생각과 아군의 개념은 극명하게 차이 날 수밖에 없다. 상대가 적인데 적의 옳은 것은 나에게 그 반대가 되는데. 그 상황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완전히 내 기준이다. 제3자의 측면에서 보면 옳고 그름, 편들기가 쉽지 않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장미 한 송이를 내보이면서 아름답게 보이느냐, 그렇지 않느냐고 묻고 yes 혹은 no라고 대답하라면 과연 어찌 결정할까. 꽃가루에 알러지가 있는 사람은 No 대답이 나올 것이다. 향과 색을 좋아하면 yes라 할 것이다. 자기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고 아무도 그 대답에 대하여 다른 의견을 강요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 대선에서 두 사람이 맞붙었다. 트럼프와 해리스, 한쪽이 승리하였다. 이것도 yes냐 no의 현장이다. 미국 국민의 과반수가 한쪽을 선택하였다. 선택되지 않은 쪽은 잘못된 것인가. 결코, 아니다. 단지 선택된 쪽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끔 법에도 눈물이 있다고 한다. 저지른 범죄만을 보고 판단할 때는 확실히 유죄이나 그 범죄를 저지른 이유와 상황은 결코 범죄로 처벌해야 할 사항이 아닌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장발장은 배고픔으로 빵 한 쪽을 훔친 죄로 감옥살이를 하다 탈옥하여 평생을 쫓기는 신세가 된다. 가장 기본적인 굶주림의 해결이라고 하면 인간사회에서는 충분히 아량을 베풀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도 흑백의 논리로 처벌해야 하는 것에 의견이 갈릴 수 있다.

이 세상 삶에서는 이것보다도 훨씬 더 복잡한 문제로 얽혀있는 경우도 많다. 범죄인도 그 범죄를 일으킨 이유를 깊이 들여다보면 결코 범으로만 처단할 수 없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법이라는 절대 기준으로 변수가 많은 사건을 간단히 재단하여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절대 바람직하지 않으나 어쩌다 현대사회는 모두 자기 나름대로 원칙과 기준이 있고 이에 따라 정한 기준을 넘어서면 옳지 않은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이 사회 모순의 한 면이기도 하다. 선이 악을 이긴다고 한다. 선과 악. 대칭점에서 서로를 응시한다. 대칭에서 융합되는 지점은 있을 것인가. yes와 no가 아닌 well(글쎄)은 우리 생활에서 분명히 존재한다.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