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담산책] 대가족의 향수
신동화 명예교수의 살며 생각하며(276)
윗채, 아래채, 방 4개에 광이 있고, 부엌이 3개 딸려 있어 밥 짓고 난방을 책임졌다. 곡식을 저장할 창고가 붙어있는 전형적인 시골 중산층의 모습, 그 속에서 20명이 넘는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다. 그래도 들판 중앙에 40여 가구가 모여 살던 크지 않은 촌락에서 부모님 덕에 밥 끼니를 걱정하지 않고 살았다.
모두가 겪었던 6.25의 어려움도 소와 곡식을 빼앗기는 했지만, 더 큰 탈 없이 겪어냈다. 유난히 교육에 혼신의 노력을 하셨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삼촌들과 내 형제, 그리고 사촌들, 때가 되면 학교에 다닐 수 있었고 그 덕으로 그때 인기 있었던 직업군인 교사 집안이 되었다. 이들이 이제는 모두 한 가정을 이루어 번창한 대가족 일원으로 큰 가계를 일구는 데 한몫을 하고 있다.
지나온 후 지금의 얘기이고 우리 형제, 자매가 한창 클 때는 넓지 않은 집안 각 방에 나눠 자고 생활하면서 매일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따뜻한 눈길을 익히 느끼면서 살았다. 그때는 조부모님의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살갑게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 하나하나를 되짚어 보면 끔찍이 쏟은 애정을 느끼면서 따뜻함이 온몸으로 전달된다. 지금은 아버지가 어렵게 마련해놓은 멀지 않은 선산에서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를 위에 모시고 아들과 손자를 옆에 거느리고 편히 쉬고 계신다. 겨우 명절 때 얼핏 인사드리고 총총히 헤어지는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도 살아생전 조부모님, 부모의 모습으로 가슴 가득히 애틋한 정이 가득 채워진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상상이 되지 않는 8남매, 그리고 사촌들까지 조부모님을 모시고 한 울타리 안에서 살면서 북적거렸던 우리 집, 지금도 그 집안의 모든 구석구석이 하나하나 뚜렷한 영상이 되어 머릿속 스크린에 뚜렷이 비친다. 여기에, 외양간에는 큰 소가 항상 버티고 있었으며 큰누나가 정성 들여 보살폈던 돼지, 유난히 그 큰 돼지는 큰누나를 따랐고 항상 꿀꿀거리며 반가움을 나타내곤 했다.
우리 가족 모두가 사랑을 듬뿍 쏟았던 개의 추억을 어찌 말 안 할 수가 있다. 목줄에 매여 낑낑거리는 도시의 개가 아니라 자유롭게 동네를 활개 치고 다니고 곡식이 한참 자라는 들판은 제 운동장이었다. 가까이 있는 시냇가에 가면 목욕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첨벙 물에 뛰어들어 우리와 같이 물고기와 눈 맞춤하는 모습을 그냥 일상으로 경험하면서 하루를 보내곤 했다. 한여름, 초가집이라고 그 더위는 막을 수 없어 앞뜰, 나지막한 언덕이 있는 틈(제방) 위에 어렵게 구한 나무 기둥 4개를 세우고 얼기설기 엮어서 거처를 마련한, 우리 이름으로 “새막” 지어 놓고 한여름을 거뜬하고 시원하게 지냈다. 여름방학에는 우리의 낮 행동반경은 이 새막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옆 논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와 닿는 듯, 그렇게 시원히 들려 우리를 즐겁게 해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밭에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정성스레 심어놓은 콩, 수수, 들깨, 참깨, 고구마 등이 계절을 달리하며 무럭무럭 자라고 논에서는 벼들이 하루가 다르게 키를 키우고 있다. 그 밑에 어찌 개구리와 이를 노리는 뱀이 없겠는가. 자연에서 함께 생활했던 이들 식물과 동물들이 모두 이웃이 되었고 깊게 교감은 되지 않았지만, 평생 이렇게 같이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런 모습이 결코 변하리라 어찌 생각했겠는가. 내일도, 모레도 같을 것이라 여기면서 대가족이 모여 살면 서로 무언의 교감으로 이해하고 양보하면서 내 것을 챙기기 전에 나누는 것이 일상화되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마음가짐이 지금도 마음속, 내 행동에 남아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은 나를 키워 준 대가족에서 스스로 얻은 마음가짐이라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다.
그렇게 많은 식구가 같이 살면서도 한 번도 불편하거나 어렵다고 느껴본 적이 없으니 이 또한 변화된 환경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지금의 마음 바탕을 마련해주었다고 여긴다. 어려움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면서 그래도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가짐, 대가족 생활이 주는 또 다른 장점이요 사람을 만드는 교훈으로 작용한다. 지금도 형제자매의 끈끈한 정을 이어가는 것은 오롯이 우리 대가족이 함께 살았던 그 온정이 지금껏 남아 식지 않는 따뜻함 있기 때문이다.
아궁이에서 타고 남은 숯불을 화로에 담아 할아버지 방에 놓아드리면 우리는 이 화로가 밤 구워 먹는 좋은 기회가 되었고 미리 칼로 구멍을 뚫어 놓아야 밤이 튀지 않는다는 것을 할아버지께 배웠다. 화로에서 갓 구워진 군밤의 맛이라니 어찌 근처 가게에서 팔고 있는 군밤에 비할 수 있으랴. 지금도 그 맛이 내 입안 언저리에 남아 군침이 돈다.
시골 생활에서는 풍요로운, 하긴 그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자연에서 주는 온갖 먹을거리는 그 싱싱하고 담백한 자연물들이 내 건강을 지금까지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든 기본 틀이 되었다. 십리(4km)도 더 되었던 초등학교, 더 멀리 가야 했던 중, 고등학교, 매일 뛰지 않으면 지각을 면치 못했으니 어찌 뜀박질에서 뒤질 수 있으랴. 그 운동이 지금도 내 종아리에 남아 늙음의 속도를 늦추고 있고 움직이는데 튼튼한 버팀목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제 시대가 변하여 이전 대가족 생활은 과거에 묻혀 그 생활을 해왔던 나이 먹은 사람의 머릿속에만 그 정취가 남아있다. 이 시대를 사는 내 후대는 그들만의 새로운 세상을 살겠지만, 선대가 살았던 대가족에서 느끼고 경험했던 그 삶의 지혜를 승계받았으면 하는데 경험하지 않고 어찌 그 느낌을 전수하겠는가. 그냥 바람으로 그쳐야겠지. 그래도 아쉬움은 거둬들일 수가 없다.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