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화 명예교수의 살며 생각하며 (97)

 

같은 시간대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큰 인연
나의 마음에 남는다는 것을 알면 모두가 귀한 존재

며칠 전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기념일을 맞아 평소 교분을 쌓고 지내던 가까운 분이 꽃바구니를 보내왔다. 장미 등 형형색색의 꽃으로 아름답게 구색을 갖추었고 마음에 와닿는 글귀까지 꽂아놓아 감사한 마음이 볼 때마다 되살려진다. 겨우 2~3일이 지나니 꽃들이 시들기 시작했고 열흘이 지나니 본래 아름다움을 잃은 모습이 되어 이제 이 꽃바구니의 역할은 다 끝났다고 전해주는데도 선뜻 쓰레기로 만들어버리기가 쉽지 않다. 보내주신 분의 성의와 평소 품고 있던 정이 생각나 마음에 갈등을 일으키나 보다.

내가 살았던 시골 고향에도 죽은 나무를 오래오래 놓아두고 보살피는 분이 있었다. 그 옆을 지날 때마다 이제 잘라내 버려야 할 터인데 계속 놓아두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느 때 건너들은 사연은 충분히 이해가 가고 오히려 애틋한 마음이 아리게 전달된다. 돌연한 사고로 생을 마친 아들이 심어 정성 들여 가꾸어 놓은 나무였다. 아마도 그 나무를 대할 때마다 결코 잊지 못할, 놓쳐버린 아쉬운 정을 생각하며 애틋하게 챙기는 심정을 옅게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아픈 내면의 깊이를 모두 헤아리기는 어렵겠지만.

우리 집에도 오래된 물건이 여기저기 켜켜이 제자리를 잡아놓고 있다. 결혼 후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준비한 큰 교자상(그때는 집에 손님을 초대하여 식사하는 것이 일상화되었으니) 두 개가 버티고 있다. 옻칠하여 정성스럽게 만든 작품이다. 아마도 결혼 선물로 준비한 것이 아닌가 여겨지는데 이제 손님을 초대하여 집에서 잔치할 일이 거의 없으니 소임의 용도가 다하여 버리자는 내 제안을 집사람이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다. 미련이 남아있어 지금도 집 한구석에 자기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집안 여기저기를 둘러보면 어머님께서 쓰셨던 물건들로 베 짜는 보디 집과 북 등 낯익은 용구들, 할아버님의 손때가 묻은 고생 창연한 벼룻집과 벼루 등등 내 기억 속에 깊이 뿌리박혀있는 자취를 증명해 주는 물건은 자리를 차지해도 내 생과 같이해야 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나 아니면 결코 그 중요성과 애착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이들 물건 하나하나에는 내 지나온 세월이 겹겹이 쌓여있고 그 속에 내 삶의 흔적이 스며들어있으니 어찌 애착이 가지 않겠는가.

우리는 모두 자기가 이끼고 마음에 담고 있는 물건이 있을 것이다. 하물며 물건도 그런 마음에 큰 여운을 남기고 있는데 살아있는 생물과 사람에 이르면 그것은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오래전에 키웠다 헤어졌던 개나 정들었던 짐승, 그들과도 마음이 통하는 교류의 기회가 있었으니 이제 흔적은 사라졌지만 지금도 언뜻 생각이 난다.

물건에 대한 추억과 그 애틋한 정을 담고 있는 것과 함께 사람에 대한 마음속에 담고 있는 기억은 나이 먹어가면서 희미해지는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시간과 함께 바래는 것이 아니라 더 뚜렷해지는 것도 있다. 누구나 지나온 내 발자취에서 아픈 상처와 함께 털어 내버리지 못하고 나만이 간직하는 감정도 있다. 그런 감정이 내 머릿속에 남아있으면서 나를 이루고 있지 않나 여겨진다. 우리가 늙어가면서 가장 두려워하는 질병이 치매인데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니 고통이 없겠으나 옆에서 같이 생활했던 가족이나 친지는 못내 아쉽고 측은함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대부분은 너무나 많은 부분에서 생각을 공유하고 교류했던 옛 기억이 나만의 기억 속에 있고 상대에게서는 지워져 버렸다는 것에 허전하고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지금 기억하는 가족과 친지 그리고 내 옆에 나와 함께 있으면서 아련한 추억의 보고를 만들어주는 물건도 내게는 귀중한 자산이라 오래 기억하고 싶기는 하지만 이런 것들이 언제까지 유지되려는 지는 나 자신도 모를 것이다.

지금 내가 가진 것들 그리고 내 주위에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한 분 한 분이 너무 소중하다는 것이 느껴진다. 내 생활에서 어느 순간 같은 생각을 했고 서로를 배려하면서 마음을 주었던 기억이 더욱 소중하다. 지금은 살아가면서 같은 시간대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큰 인연이고 나의 마음에 남는다는 것을 알면 모두가 귀한 존재임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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