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화 명예교수의 살며 생각하며 (85)

 

정다운 작은 동물들 모두 내쫓아버린 것에
나도 한 부분 책임을 아니 느낄 수가 없어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공유할 이야깃거리가 많다. 매일 있는 그대로 맞는, 눈에 보이는 자연은 내 관심의 대상이었고, 잘 몰랐던 것을 스스로 깨치게 하는 좋은 스승이었다. 매일 조금씩 변하는 풍경과 그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특히나 나와 같이 더불어 살고 있는 모든 동물, 눈 익은 다양한 새들과 물고기들은 신비하고 좋은 벗이었다.

어느 날은 들판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노루가 있는가 하면 한밤중 섬뜩하게 짖어대는 늑대 소리가 귓전에 지금도 들리는 것 같다. 소복이 쌓인 눈 위에 찍힌 낯선 동물 발자국, 벼 추수가 끝나고 물이 차가워지기 시작하면 게살을 냇가에 가로질러 세우고 게막을 짓고 그 속에서 램프를 켜놓고 산란하러 내려가는 게를 기다리는 그 적막을 지금도 머릿속에서 즐긴다. 어떨 때는 양동이에 많은 양의 게를 모을 때도 있지만, 수확이 시원치 않을 때도 결코 섭섭한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삼촌이나 형을 따라가서 내가 눈을 부릅뜨고 지킨 것이 아니니.
 
지금도 눈에 선한, 모심어놓은 논을 여유롭게 돌아다니는 따오기며 뜸부기의 그 아련한 울음소리가 너무나 정답게 생생히 기억된다. 저녁에는 어느 나무에 앉았는지 가늠되지 않는 소쩍새나 부엉이는 아마도 여름, 우리와 함께한 가장 정다운 이웃, 새들이 아닌가 여겨진다. 지금은 모두가 사라져 별도 증식하여 자연에 방사하는 수고를 하고 있다니, 자연에서 이들을 옛날같이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논 사이로 흐르는 개울가에 소새(물총새)의 진초록 아름다운 색과 물고기를 잡으려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지금도 가슴에 와 닿는다. 초봄이 지나면서 먼 산에서 들려오는 꿩 소리며 들판의 음악가 종달새는 또 다른 봄의 전령사요, 나와 함께한 세월을 일깨워주는 잊힐 수 없는 기억 속의 자취로만 남아있다.

아침 일어나면 빨랫줄에 나란히 앉아 지지배배 아침 인사를 하는 제비들은 다 어디로 가서 눈에 보이지 않는가. 근래는 그 흔한 꿩 소리도 듣지 못한다. 심지어 시골에 가서도 그 정다운 울음을 즐길 수 없으니, 이 자연이 지금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심히 불안하다.

어릴 때 산속을 걷다 산토끼의 새까만 똥을 보고 두리번거리며 그 녀석을 찾는데, 한참 잊고 거닐다 보면 나 여기 있다고 앞에서 뛰어간다. 겨울에는 전교생이 체력단련이란 명목으로 산토끼 사냥을 나가기도 했는데, 잡아본 기억은 별로 없다. 종달새나 물총새에 넋이 빠져 이 녀석을 잡아서 같이 놀면 좋겠다는 생각에 얼룽게(덫)를 놓아 잡으려 무척 노력했던 생각이 난다.

별로 성공한 기억은 없지만, 야생의 그들이 과연 나와 친구가 될 수 있겠는가. 어릴 때의 생각은 살아있는 것을 더불어 같이 지낼 수 있는 것이라 여겼지 않았나 짐작할 뿐이다. 들판을 지나거나 풀숲을 헤치다 보면 가끔 뱀이 나오는 것은 어릴 때도 끔찍한 경험이다. 아주 큰 구렁이도 가끔 있었지만, 살모사나 꽃뱀은 어찌 그렇게 무서웠는지. 우리 유전인자에 뱀을 무서워하게 각인이 되어있는가. 아니면 성경의 영향인가.

이 모든 생물, 자연에서 나와 함께한 오랫동안 애틋하게 정들었고 내 마음속에 지금도 살아있는, 잊히지 않는 귀여운 동물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인간이 만들어놓은 이 괴물 같은 도시와 인위적인 시설물들을 피해 다른 세상으로 가버린 것인가. 지구에 제일 늦게 출현한 인간만이 이 지구에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이 정다운 작은 동물들을 모두 내쫓아버린 것에 나도 한 부분 책임을 아니 느낄 수가 없다.

단지 내 머릿속에만 남아있는 그들의 모습, 지금 젊은이들에게는 그 영상마저도 없을 테니 아쉬움도 있을 수 없겠지. 이 지구상 모든 생명체는 한 뿌리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과연 인간만이 홀로 존재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사라져 버린 그들에게 어떻게 용서를 구할 수 있을지.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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