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화 명예교수의 살며 생각하며 (65)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기억은 결코 외부 요구에 의해
지워질 수도, 지워져서도 안 된다

오랜 세월이 흘러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으나 가보지 못했던 곳을 방문하여 기억 속 내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보는 순간 반가움과 애틋한 정이 함께 한다. 고향집에 들렀을 때 내가 흠집을 냈던 마루 한 구석에 남은 자국을 알아보고 그때를 문득 연상하면서 그 순간 세월을 뛰어 넘어 그 장면으로 돌아가본 경험, 뛰놀던 뜰에 심어 놓았던 나무가 훌쩍 커버려 내가 심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게 변한 것, 초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과 같이 땀 흘리면서 어린 손으로 심어 놓았던 운동장의 플라타나스가 아름드리 거목이 된 것을 보면서, 보이는 대상에서 느끼는 감정을 넘어 기억으로 추억을 되새기는 경험을 한다.

그래서 누구나 오랜 시간에 묻혔던 기억을 이야기로 엮어낼 수 있고 그것을 아름다움으로 되새기며 내 존재를 확인하나 보다. 기억과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형제간이나 친구들, 나이를 먹어 갈수록 귀하고 사랑스러운 이유이다. 애틋한 추억을 같이 할 수 있고 그들의 얼굴에서 내 존재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말, “내가 이 세상에 남겨 놓은 흔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그게 형체를 갖는 물건이든 정신이나 마음속에 담아 있는 것이든 그때 그 순간에 있었고 느낀 것이 없어질 수는 없다. 물리적으로 물질이 소멸된다 하더라도 존재했던 그 자체가 스러지는 것은 아니고, 또한 순간 생각하고 마음에 품었던 것도 그 자체로 그 순간에 존재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특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경우에 따라 본인은 잊고 싶을런지 모르지만 그 말과 행동에 의해 이익 혹은 불이익을 받은 사람은 어찌 그 일을 잊을 수 있겠는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도 가지고 가지 않을까 여겨졌다.

보통 어린 시절 고향에서 자랐던 기억은 평생을 잊혀지지 않고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정지용 시인의 ‘향수’에서도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 읊었고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마음 바닥의 감정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꿈에서도 나타나니 어찌 잊겠는가.
 
가끔 나이 들어 치매의 어려움을 겪는 가까운 가족 면회를 가서 나누는 대화 중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나와 얽힌 옛 기억을 나보다 더 정확히 기억하는 것을 들으며 컴퓨터 메모리를 연상한다. 우리 기억은 선별적이긴 하나 살아있는 동안은 내 주위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우리 머리에 남은 기억과 그 기억에 얽힌 추억이 사라질 때 인간으로서 존재 가치가 무너지고, 추억이 사라질 때 인간으로서 실존이 스러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래서 나이 먹어 가면서 치매를 가장 두려워하고, 치매는 피하고 싶은 대상 1위인 질병이다. 내가 오래 가다듬어 놓았던 인격과 가치를 송두리째 파괴하고, 나 아닌 다른 사람으로 변해 버림은 가족과 지인에게 비참한 심정을 안겨준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내 의지에 의해서 할 수 있을 한계를 훨씬 넘어선 경지이니, 이 또한 헛된 바람이란 생각이 든다.

부모, 형제 등 가족과 교사가 중요한 이유는 어린 머릿속 백지 상태의 뇌, 기억 단자에 영원히 기록될 단초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치매 걸린 분이 옛 기억을 그토록 선명하게 하는 이유는 가장 깨끗한 상태에서 최초로 입력하는 정보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초등학교와 중학교 선생님들의 행동과 가르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 느낀다.

내 경우 초등학교 3, 4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마룻바닥에 끌고 다니면서 내는 군화 소리를 지금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이 기억을 잊으라고 하면 가능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철들어 다녔던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의 이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으며, 그때 인상에 남았던 말씀이나 행동은 시간을 넘어 지금도 어제 일 같이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분의 수필에서 본 것, 어릴 때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방황하는 어린이에게 보냈던 선생님의 따뜻한 정이 한 학생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그 학생이 사회의 거목으로 성장한 과정을 그리고 있다. 감동적인 내용이었다.

우리 머릿속에 각인된 기억은 결코 외부의 요구에 의해 지워질 수도 없고 지워져서도 아니 된다. 자기 임무가 다하였다고 하여 내가 한 일은 잊어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자기만의 생각이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거나 끼친 영향은 그 자체로 결코 잊혀질 수 없다. 치매라고 하는 최악의 질병이 찾아오기 전에는. 이걸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고 사는 오늘 하루, 내 행동이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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