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구
제주대 해양의생명과학부
석좌교수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세월의 강물이 흐르며 지난 봄 연두 빛 신록이 짙푸른 녹음을 거쳐 붉은 치마를 걸치고 있다. 깊은 숲속의 산길엔 벌써 갈색낙엽이 수북하게 쌓이고 있었다. 산길에서 만난 가을바람은 사랑하는 이의 손길처럼 부드럽고 싱그러웠다. 언제나 다시 보고 싶고 가슴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싶은 존재이다. 내 얼굴을 스친 바람은 또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며 그리움을 남긴다.

1. 충주호의 푸른 물결과 맑은 바람
오늘은 산악회 버스 대신에 승용차 두 대로 충주호의 푸른 물결과 맑은 바람이 있는 곳으로 떠난다. 수도권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이므로 산행시작점인 복평 마을에 이른 아침 도착하였다. 「흐르는 강물처럼」이란 허름한 펜션을 끼고 돌면 바로 숲속으로 들어서게 된다. 숲에 들어서자마자 가을분위기가 가득하였다. 산길의 풀잎은 누렇게 변화되고 나뭇잎은 노랗고 붉게 물들기 시작하였다.

가을의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첫 번째 능선에 보덕굴과 보덕암이란 작은 산사가 나온다. 보덕굴은 커다란 바위 아래 굴이 있는데 기도하는 곳으로 보였고 보덕암에 오르니 어느 스님이 색소폰 연주를 하고 있었다. 연주 소리가 모든 이의 마음을 끌어들여 함께한 한 산우는 뒤늦게 산길을 따라오기도 하였다. 어떤 분야든 최고의 경지에 이르면 참으로 아름답게 보이는 것 같다.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 하고 그들과 함께 호흡하면 우리의 마음도 충주호의 푸른 물결과 맑은 바람을 닮아갈 것이란 생각을 하며 하봉(934m)에 올라섰다.

2. 불타는 숲과 월악산의 아찔한 철제사다리
월악산은 하봉에서 중봉(1015m)을 거쳐 영봉(1094m)으로 가는 산길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할 수 있다. 날카롭게 솟아있는 산길을 따라 올라가며 충주호 쪽을 내려다보면 짙푸름이 올라오고 숲은 노랗고 붉게 타오르고 있다. 가파르게 오르는 산길엔 수많은 나무 데크가 놓여있으며 영봉으로 오르는 산길은 오금이 조여 올 정도로 낭떠러지에 철제사다리를 설치하였다. 고개를 바짝 숙이고 오르고 또 올라서 영봉의 정상에 설 수 있었다.

이 영봉은 또한 국사봉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개성의 송악산을 중심으로 고려의 왕건에 대비되는 것으로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와 딸 덕주 공주가 월악산 기슭에 피신하였기 때문이다.

 

3. 월악산 기슭의 덕주사
영봉에서 하산하는 산길은 참으로 아름다운 산길이다. 노랗고 붉은 치마를 두른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이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하산을 하였다. 송계삼거리를 거쳐 마애불로 내려가는 산길은 길고도 길지만 충주호의 푸른 물결과 맑은 바람이 친구가 되어준다.

마애불에서 조금 내려오면 덕주사가 보인다. 이 산사 부근엔 하얀 꽃과 노란 꽃이 많이 보인다. 천 년 전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와 딸 덕주 공주가 추위에 쫓겨 찾아 든 곳이 월악산 기슭의 작고 허름한 월악사(月岳寺)였다. 덕주 공주는 오빠를 의지하며 살아가려 했는데 오빠는 어느 날 아침 마의(麻衣) 하나만 걸치고 신라 재건의 꿈을 되뇌며 홀연히 떠나버렸다.

그로부터 사람들은 그를 마의태자라 불렀고 홀로 남게 된 덕주 공주는 월악사에서 머리를 깍고 스님이 되었다. 그때부터 월악사의 이름은 덕주사로 불리고 있고 덕주사의 경내를 둘러보면 천 년 전의 공주의 아픔과 눈물이 배어있음을 느낀다. 궁전의 화려한 정원에서 자라던 소녀, 덕주 공주는 가을이 오면 지금도 이 산사 부근의 온갖 하얀 꽃과 노란 꽃에 놀러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4. 주지육림의 경순왕
세계적으로 한 왕조가 천 년의 세월을 유지한 사례는 흔치 않다. 신라왕조는 그 위대한 업적을 남긴 천년왕국이다. 그 긴 신라의 역사를 마감했던 주인공이 신라 제56대 임금인 경순왕이다.

왕가의 부패와 귀족들의 방탕한 생활로 나약해진 신라는 고려 왕건의 막강한 힘 앞에서 무너져 가고 있었다. 왕건은 강압적인 병권보다 전략적 회유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런 심리전술이 유효하여 신라 조정은 두 파벌로 분열되었다. 아버지 경순왕은 투항하자는 화친파이고 그의 아들인 마의태자와 딸인 덕주 공주는 주전파에 서게 되었다.

아버지 경순왕은 개경으로 들어가 수없이 많은 백성들이 지켜보는 광장에서 고려 태조 왕건에게 무릎을 꿇었다. 경순왕은 그 대가로 고려 왕실의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주지육림(酒池肉林)을 즐기게 되었다.
 
5. 덕주 공주의 눈물이 서려있는 덕주사

궁전에서 온갖 귀여움과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자라던 소녀, 덕주 공주는 작고 허름한 월악사란 산사에서 머리를 깎았다. 잘려나가는 머리칼을 보며 많은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지금도 이 산사를 끼고 흐르는 계곡엔 그녀의 눈물이 보이는 듯하였다. 천 년이 지났지만 이 계곡에 내려와 숱하게 피어 있는 하얀 꽃과 노란 꽃을 즐겼으면 한다. 궁전의 화려한 정원보다도 아름다운 덕주사엔 아직도 그녀의 눈물이 흐르고 있다.

김현구
제주대 해양의생명과학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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