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구
제주대 해양의생명과학부
석좌교수

지난 여름은 40여 년 만에 무더위가 찾아왔었다. 가을이 쉽게 올 것 같지 않았으나 어느새 지독한 무더위는 물러가고 조석으론 스산한 바람이 불고 있다. 남녘의 땅 부산으로 내려가는 차창을 통하여 누런 들녘이 가슴으로 들어온다. 산기슭의 밤송이도 익어가고 도로변의 분홍빛 코스모스 꽃이 한들거리며 춤을 춘다.

누구는 한들거리는 코스모스 꽃을 보며 첫사랑의 아픔을 회억하고 누구는 황금빛 들녘을 보며 고향의 그리움에 빠질지 모른다. 멀고 먼 길을 산악회 버스에 몸을 맡기고 차창을 응시한다. 흘러가버린 지난날들은 힘든 시기도 있었고 기쁜 날들도 있었다. 대전과 대구지역을 지나 밀양지역을 지날 때 소백산 기슭에 귀촌하여 살고 있는 정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소백산 기슭에도 가을이 왔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 곱게 핀 코스모스 꽃이 한창이라고 한다. 그는 석양이 아름다울 때 꽃밭을 거닌다고 한다. 꽃밭을 거닐며 첫사랑 때 나누었던 밀어들을 되새기고 있을 것이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소백산 기슭의 가을 하늘아래에서 더덕구이로 막걸리를 나누자는 전화를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차창에 스치는 누런 들녘과 하루가 다르게 산기슭의 달라진 모습을 보며 가을을 느끼고 있었다고 하였다.

정수와 전화를 마친 후 오늘 트레킹의 시작점인 동생말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가을 하늘엔 흰 구름이 떠가고 짙푸른 바다엔 2층으로 되어있는 광안대교가 나그네를 맞이하여 주었다. 광안대교 건너편엔 학회 등으로 몇 번 찾았던 센텀 시티와 해운대의 마천루가 눈에 들어온다. 오늘 함께 한 산우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해안산책로로 들어섰다.

해안 산책길에 들어서면 무엇보다도 짙푸른 파도가 밀려오고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해안절벽의 바위에 밀려오는 파도가 부딪치며 하얀 거품을 토해낸다. 그 거품은 다시 밀려가서 멀리 수평선 밖으로 여행을 떠난다. 언제 다시 만날 기약도 없이 떠난다. 내 친구 정수의 첫사랑도 그렇게 떠났지만 그는 미림이와 함께했던 날들을 무척 그리워하였다.

 

수평선 너머 저 먼 곳에서 밀려오는
짙푸른 파도는 해안절벽의 바위에 부서지며
하얀 거품을 토해내며 새로운 여행을 떠난다.

소백산 기슭의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엔
밀려오는 스산한 가을바람으로
아름다운 석양의 코스모스 꽃이 새로운 여행을 떠난다.
 
남녘의 짙푸른 바다와 소백산의 청산(靑山)이
멀리 떨어져 잘 보이지 않지만
바다의 파도소리 높아갈 때 소백산 기슭의 석양이 새로운 여행을 떠난다.

--시인 김현구, 짙푸른 바다에 파도소리는 높아가고 ---

파도소리 들리는 해안산책길을 걸으며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어울마당, 치마바위, 농바위를 거쳐 오륙도 스카이워크까지 천천히 걸어도 3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오늘 걸었던 곳을 이기대(二妓臺)라 하는데 동래영지(東來營誌)에 의하면 좌수영에서 남쪽으로 15 리에 있으며 두 기생의 무덤이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한편 향토사학자 최한복은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수영성을 함락시키고 이곳에서 연회를 열었는데 수영의 의로운 기녀가 자청해 연회에 참가해 술에 취한 왜장을 안고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설명하고 있다.
 
이기대 해안 산책길을 둘러보고 귀로에 해동용궁사를 찾기로 하였다. 수산과학원 옆에 위치하며 짙푸른 바다를 보고 서 있는 사찰이다. 이 사찰 입구는 산에 있는 산사와 달리 매우 번잡하였다. 좁고 번잡한 길을 지나서 막상 사원에 들어서니 짙푸른 바다를 조망할 수 있고 생각보다 조용하였다.

오늘은 한 달에 한 번씩 전문적인 산행을 떠나 트레킹을 하는 날이다. 힘든 산행을 피하여 트레킹만 참가하는 산우들도 있다. 이렇게 새로운 산우들과 남녘의 부산까지 짙푸른 바다에 파도소리를 함께 할 수 있어 기쁜 날이었다. 멀리 가을이 드리운 소백산 기슭, 정수의 그리운 목소리도 들을 수 있어 행복한 날이었다.

김현구
제주대 해양의생명과학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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