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구
제주대 해양의생명과학부
석좌교수

영광의 불갑산으로 상사화 산행을 떠날까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교통의 혼잡을 고려하여 가까운 광교산을 오르기로 하였다. 상사화(相思花)란 이룰 수 없는 사랑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잎사귀가 피어 있는 동안 꽃을 볼 수 없고 주황색깔의 예쁜 꽃이 필 때면 이미 잎은 모두 진 상태이다. 잎과 꽃이 단 하루만이라도 만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늘은 한가위 명절을 보내고 이른 아침 집을 나섰다. 여름날의 소낙비처럼 굵은 빗방울이 짙푸른 나뭇잎을 적시고 있었다. 빗속을 거닐며 여우골 계곡으로 들어섰다. 굵어진 빗방울이 등산화 속으로 스며들며 적셔오고 있다. 하지만 가을비를 맞으며 숲속을 걷는 일은 세상일을 모두 잊을 수 있어 좋다. 숲속의 향긋한 나뭇잎과 흙 내음을 맡으며 형제봉을 향하여 올랐다.

형제봉 부근에서 준비해 온 따끈한 커피를 마셨다. 흠뻑 가을비를 맞은 상태에서 따뜻함이 그리웠는지 모른다. 따뜻함의 힘으로 토끼재를 거쳐 단숨에 시루봉 정상에 올랐다. 정상엔 늘 많은 등산객으로 붐비지만 오늘은 가을비로 인하여 한산하였다. 호젓함이 묻어나는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본다. 수원과 분당 등 도시는 옅은 안개에 휩싸여 있지만 광교산의 숲은 가을비에 적셔져 푸름을 더하고 있었다.

호젓한 숲길을 따라 걷는다. 가을비가 지나간 후라 흙 내음이 올라온다. 산길의 풀잎 내음이 가슴으로 밀려오고 숲속의 숱한 나뭇잎이 빗물을 머금고 있었다. 가을비의 축복을 받은 숲은 불갑산의 상사화처럼 빛나고 있었다. 갈대밭과 절터를 거쳐 하산을 하고 있는데 한 송이 상사화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역시 잎사귀는 보이지 않고 주황색 꽃만을 피우고 있었다. 내가 신이라면 그 상사화의 줄기에 잎사귀를 달아주고 싶었지만 그냥 한참동안 바라보다 산길을 떠났다.

 

슬퍼하지 마라.
네 곁에 없다고 없는 게 아니다.

네가 피기도 전에 떨어진 잎새들이
산그늘에 숨어서 너를 보고 있다.

새가 되어 이골 저골 날기도 하고
나비가 되어 춤을 추기도 한다.
가끔은 너를 보며 눈물도 흘린다.
 
네 곁에 없다고 슬퍼하지 마라.
네가 진실로 그리워하면 보인다.
다 보인다.

--- 시인 이재봉, 상사화에게 ---

그렇다. 곁에 없다고 슬퍼할 일이 아니다. 진실로 그리워하면 다 보인다. 시인 이재봉님을 이곳으로 초대하고 싶다. 함께 오늘 걸었던 산길을 걷고 난 후 한 잔의 막걸리를 나누고 싶다. 상사화에게 보냈던 “진실 된 그리움”을 함께 나누고 싶다. 이 세상에 진실 된 그리움은 모든 걸 다 보게 해 줄 수 있는 힘이 있다.
 
이룰 수 없는 사랑, 상사화는 광교산에도 피어 있었다. 불갑산엔 지금쯤 상사화의 바다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광교산의 한 송이 상사화로도 불갑산의 수백만 송이의 상사화가 다 보였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진실 된 그리움이 태산보다 높게 쌓였으면 좋겠다.

김현구
제주대 해양의생명과학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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