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구
제주대 해양의생명과학부
석좌교수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산바람이라 한다. 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들바람이라 한다. 산바람과 들바람을 합해서 산들바람이라 한다. 들바람에선 아직 시원함을 느낄 수 없지만 산바람 속엔 어느덧 선선한 가을의 기운이 서려있다. 오늘 소백산을 오르며 짙푸른 숲속과 계곡에서 가을 기운을 느끼고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일엽초(一葉草)는 초가을의 바람을 맞이하고 있었다.

오늘 소백산 산행은 단양의 새밭에서 시작하였다. 새밭 유원지를 조금 지나면 바로 늦은맥이재로 오르는 계곡에 들어선다. 계곡에 들어서자 움찔할 정도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이곳은 어제 많은 비가 내린 관계로 계곡의 수량이 지극히 많았고 사납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거칠게 흘러내리는 계곡의 주위는 가을 분위기를 내고도 남을 정도로 시원하였다.

계곡으로 오르는 산길엔 많은 물로 쉽지 않았다. 산기슭에선 등산화를 물속에 넣어야 했고 3부 능선부터 7부 능선까지의 산길엔 흐르는 물로 조심스럽게 올라야했다. 그러나 오늘은 날씨가 흐리고 햇볕이 비추이지 않아 울창한 숲속엔 가을이 다가온 듯하였다. 아직 도시에선 여름의 절정을 지나고 있지만 높은 산의 숲속에선 계절을 앞선 가을 기운이 서려있다. 아름다운 숲속의 가을 기운을 느끼며 늦은맥이재(1272m)에 올라섰다.
 

 

처음 계획은 늦은맥이재에서 민봉 삼거리를 거쳐 신선봉과 절골 계곡으로 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절골 계곡의 많은 수량으로 하산이 어렵다는 소식으로 민봉을 거쳐 구인사로 내려가는 산길로 수정하였다. 민봉으로 가는 산길엔 유난히도 숲속의 풀잎이 허리춤까지 올라와 향긋한 풋내가 가슴으로 밀려왔다. 민봉 삼거리에서 잠시 쉬면서 큰 바위를 바라보니 눈에 띄는 풀잎이 있다. 커다란 바위 윗면의 흙더미에 일엽초란 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일엽초를 사진에 담는 사진작가의 설명에 의하면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오직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한 잎으로 일생을 보낸다고 한다.

일생 동안 소박하고 욕심이 없는 일엽초를 마음에 그려보며 민봉 정상에 올라섰다. 민봉에 올라서자 얼굴에 스치는 바람이 시원하였다. 가을바람이 불고 있었다. 하늘엔 잿빛구름이 흐르고 또 산 너머 저쪽에선 구름과 함께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펑퍼짐하고 널따란 민봉엔 온통 야생화의 천국을 이루고 있었다. 노란 꽃이 많이 띄는데 초가을에 피는 꽃이라 한다. 벌써 이곳은 가을의 기운이 서려 있고 가을을 노래하고 있었다.

여름 가면
가을 꽃 피어난다.

지난 계절에 피었던 꽃이
자리를 내줄 시간이다.
 
여름의 끝자락을 붙들고
기억 저편으로 떠날 채비다.

--- 시인 조운, 입추 ---

민봉에서 오늘 산행의 종점인 구인사까지 가려면 4시간 이상 더 걸어야 한다. 길고도 긴 하산 길에도 계곡의 많은 물로 쉽지 않았다. 구인사를 앉고 있는 산정에 도착할 무렵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워낙 거센 소낙비라 조금만 맞아도 옷이 흠뻑 젖었다. 여름비를 맞으며 걸으니 시원한 마음도 들었다. 몸속으로 스며드는 빗물과 오늘 민봉 삼거리에서 보았던 일엽초를 떠올렸다. 내 마음에도 일엽초를 한 잎 심고 싶은 마음으로 시인 조병화님의 시를 읊어본다.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과거가 있단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과거가

비가 오는 거리를 혼자 걸으면서
무언가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란다

--- 시인 조병화,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과거가 있단다 ---

구인사를 앉고 있는 산정에서 주차장까지 30여 분 걸으며 여름비를 흠뻑 맞았다. 오늘 산행은 총 7시간 30분에 걸쳐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었다. 여름 산행에서 소낙비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따가운 햇살을 막아주어서 좋으나 등산화와 옷에 빗물이 스며들어 산길을 걷는데 불편을 준다. 그러나 시인 조병화님의 시(詩)를 읊조리며 위로를 받는다.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과거가 있을 것이라고.

다음주 입추가 오면 높은 산, 깊은 숲속의 가을기운이 도시에도 서서히 내려오리라 생각한다. 시인 조운님도 이때를 「여름의 끝자락」이고 「지난 계절에 피었던 꽃이 자리를 내줄 시간이다」라고 하였다. 산에 오르면 순환하는 계절을 앞서가며 맞이할 수 있다. 산바람 타고 온 가을 기운을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과거가 있는 이들」에게 드리고 싶다.

김현구
제주대 해양의생명과학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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