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효경
한국식품연구원 선임연구원

최효경 한국식품연구원 대사영양연구본부 영양식이연구단 선임연구원

후성유전학은 유전자 자체의 변화가 아닌 유전자 발현 조절에 관여하는 제어시스템, 즉 유전자 발현 조절 기전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인체의 설계도면이라 할 수 있는 유전자의 A, C, G, T, 염기서열 자체의 변화없이 유전자의 변화를 조절하고 자손에게 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고령화와 더불어 서구화된 생활방식으로 말미암아 만성 대사성 질환영역에서 개인 및 사회적 비용 부담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이에 대한 해결 노력과 더불어‘삶의 질 향상’에 대한 욕구가 높아지면서 바람직한 식단과 식품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에따라 많은 과학자들은 식생활을 통해 발생하는 후성유전학적 변화와 이의 조절에 관한 연구에 주목하고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앤 퍼거슨-스미스 교수가 이끄는 연구진은 임신중인 실험 랫에게 정상보다 열량이 50% 적은 먹이를 먹인 후 변화를 관찰했다. 그 결과, 임신 마지막 주의 랫에서 태어난 새끼에게서 인슐린 대사에 중요한 유전자인 glucose transporter4(Glu4)의 발현 변화가 현저히 낮은 것으로 관찰됐으며, 이는 히스톤단백질의 탈아세틸화와 메틸화에 의해 조절됨을 입증했다.

이 실험 랫들은 체중이 가벼운 새끼(2세대)를 낳았고, 새끼들은 자라서 다양한 대사성 질환의 주요 원인인 인슐린 저항성을 보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2세대 수컷 새끼들이 자라서 낳은 새끼 랫(3세대) 역시 당뇨병 증상을 보였다는 점이다.

흥미롭게도 2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44~1945년 독일의 네덜란드 봉쇄로 인한 겨울 대기근 때 잉태된 네덜란드의 아기들(2세대)은 저체중아로 태어나 성인이 됐을 때 당뇨병, 비만, 심장병, 암 발생, 정신분열증 등이 다른 코호트에 비해 유의하게 증가했으며, 이러한 현상은 1968~1970년 Biafra 기아, 1958~1961년 중국의 대기근 후에 태어난 세대에서도 관찰되고 있다. 이러한 연구 결과들은 태아가 제한된 영양에 반응한 후성유전학적 적응의 결과로 보이며, 산모의 식생활이 자녀와 그 후손들의 건강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잘 입증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은 결과는 꿀벌에게서도 볼 수 있는데, 일벌과 여왕벌의 차이는 유전적 차이가 아니라 꿀벌의 유충들이 먹는 음식의 차이라는 것이다. 꿀벌의 유충 중 로열젤리를 먹는 유충은 여왕벌이 되며, 그렇지 않은 유충은 일벌이 된다. 즉, 개체가 섭취한 음식이 신분을 만드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장기와 성인 시기의 식이습관 역시 후성유전학적 변화를 유발하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다.

스웨덴 우메오대학의 케이티 연구그룹에 의해 2002년 수행된 역학연구에 의하면, 사춘기 전 단계의 완만한 성장기에 과식을 했던 세대의 손자들은 과식을 하지 않았던 세대의 손자들에 비해 심혈관계 질환 및 대사성 질환의 유병률이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증가했다. 또한 수유 직후 20주까지 고지방식이를 섭취한 쥐는 뇌에서 포만감 인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도파민 수용체의 과메틸화를 통해 이 단백질 생산의 감소를 가져왔다. 따라서 같은 수준의 보상을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음식을 필요로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성인 시기의 식이습관 또한 후성유전학적 변화를 유발하는 주요 요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시이다.

이와 같은 과학적 결과들은 식품 그리고 식습관이 개인의 건강뿐만 아니라 후손의 건강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는 우리가 매일 선택해서 먹는 식품들과 우리 식습관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영양과 식품 분야에서 가치있는 후성유전학적 연구 결과들이 점차 축적되고 있으나, 의ㆍ약학 분야의 후성유전학적 연구에 비교하면 아직도 초기단계라 할 수 있다.

초고령화 시대 만성질환의 증가, 의료비용 부담 증가 그리고 삶의 질 향상과 같은 사회적 문제 해결과 요구 충족을 위해 건강한 식품, 바람직한 식생활의 중요성은 수없이 강조되어도 지나침이 없으며, 이의 과학적 근거 제시를 위한 관련 연구 역시 더욱 활발히 진행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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