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구
제주대 해양의생명과학부
석좌교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것일까! 오늘 산행의 시작은 순천의 선암사에서 시작하여 조계산을 넘어 송광사로 넘어오는 산길로 예정되어 있었다. 선암사는 지난 사흘 동안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정글만리」를 쓴 조정래 작가의 고향이고 송광사의 불일암(佛日庵)은 법정스님이 오랫동안 계셨던 곳이다. 두 작가님을 그려보며 떠났던 산행 이었는데 산길을 잘못 들어 반쪽으로 끝나고 말았다.

호남고속도로의 승주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오면 선암사 주차장까지 잠깐이면 도착하게 된다. 주차장에서 선암사로 들어가는 선암사 계곡엔 어제 많은 비가 지나간 후라 시원하게 물 흐르는 소리가 숲속의 적막함을 깨우고 있었다. 선암사로 들어가는 길목의 숲은 울창하였고 이곳 아침녘의 산길은 조용하고 쾌적하였다. 이렇게 아름답고 한적한 길목으로 들어서니 마음이 한결 가볍고 선계(仙界)에 들어선 기분이 든다. 편안한 마음으로 십 여 분 걸어서 올라가면 승선교(昇仙橋)가 나온다. 조선시대의 아치교로 이 다리를 건너면 선계에 오른다는 승선교를 건너면 바로 선암사란 산사가 자리하고 있다.

산사를 둘러보며 한적하고 조용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산사를 둘러싼 조계산의 산자락이 넓은 마음의 소유자처럼 포근하게 감싸 앉은 때문일까! 한 그루가 마치 두 그루처럼 자라난 650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소나무와 원통전 뒤편에 620년 된 천연기념물 제488호 매화나무가 이 산사를 지키고 있었고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조정래 작가님의 글의 깊이가 깊고도 깊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조계산의 장군봉으로 오르기 시작하였다.

 

선암사에서 장군봉으로 오르는 산길이 처음엔 완만하였다. 그러나 5부 능선을 넘고 7부 능선에 당도하여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마엔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지만 어디선가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이 내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있었다. 시원한 물 한 모금 마시고 힘을 내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언제나 그렇지만 산행 시작 처음 한 시간이 제일 어렵다. 이 시간이 지나가니 장군봉(884.3m)에 가볍게 올라설 수 있었다.

장군봉에서 간단한 점심을 들었다. 산우들과 함께 하는 점심이 김치를 비롯한 간단한 반찬이지만 그렇게 맛있는 밥이 없다고 생각한다. 정성과 사랑으로 준비하여 준 이들에게 감사하며 점심을 먹었다. 맛있는 밥을 먹고 갈 길이 먼 산객들은 산길을 떠났다. 오늘은 점심을 비슷한 시간에 끝낸 두 산우와 길을 떠났다. 선암굴목과 마당재로 가야 하는데 그만 선암굴목의 산길에서 깃대봉 방향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깃대봉부터 걸어온 시간이 두 시간이 넘었는데 햇빛 잘 드는 마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깊은 산중에도 드문드문 한 집 두 집 사람이 사는 마을이 나타났다. 앞을 보나 뒤를 보나 깊은 산중의 마을에도 텃밭엔 보라색의 갓이 탐스럽게 자라고 있었고 수확이 끝난 배추밭엔 배추의 겉껍질을 벗겨낸 배춧잎으로 푸르른 밭을 띄고 있었다. 거의 장안마을에 내려왔을 때 우리가 길을 잘못 들어섰음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오늘 산행의 종점인 송광사의 주차장으로 가려면 100리 길이 넘는다는 계산이 나왔다. 두메산골이라 차를 부르기도 어려웠고 두 산우와 함께 도로를 걸어갔다. 이 도로를 오가는 차를 얻어 타기로 하였다. 요즘 세상인심이 그렇지만 모르는 사람을 잘 태워주지 않는 게 인지상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태워주는 입장에서 태운 사람이 어떤 사람들인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에서도 행운은 찾아왔다. 한 젊은이가 송광사로 가는 것은 아니지만 30여 분 태워줘서 구세주를 만났고 또 한 부부가 송광사 입구까지 10여 분 태워다 줘서 예정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 산행에서 길을 잘못 들어 송광사의 불일암을 못 봐서 진한 아쉬움이 남았지만 드문드문 한 두 집이 들어서 있던 마을이 선계의 마을처럼 깊은 인상을 받았다. 또 한 젊은이와 노부부의 호의를 받아서 그런지 산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 의외의 선물이 되었고 송광사의 불일암은 다음에 다시 올 수 있다는 희망을 앉고 돌아오는 산악회의 버스에 올랐다.

올라오는 산악회 버스의 차창에 스치는 들녘이 눈에 들어왔다. 벼를 베어낸 들녘은 누렇게 변화되었고 차가운 바람만 불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다 잠이 들었는데 선암사 계곡의 시원한 물소리와 깊은 산중의 외딴집에서 피어오르던 저녁연기가 선계의 영상으로 떠올랐다. 선계로 떠났던 하루의 여행이 끝나고 다음주에 오를 산을 기대하며 귀가하였다.

김현구
제주대 해양의생명과학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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