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구
제주대 해양의생명과학부
석좌교수

미림이의 감옥에 종신형을 선고받고 싶었던 정수의 편지 
오랜만에 우체국 집배원이 배달한 편지를 받았다. 전자 메일과 핸드폰의 문자 등으로 편질 받을 일이 없었는데 우체국 집배원이 배달한 편지를 받고 보니 가슴이 뛰었다. 30여 년 전엔 편지를 쓰고 편지를 받는 일이 그렇게 가슴 떨릴 일이 아니었지만 집배원이 배달한 편지를 받고 보니 궁금하고 가슴이 떨려왔다. 편지 겉봉엔 ‘소백산 기슭에서 살고 있는 정수로부터’라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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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
매주 화요일 새벽 보내주는 화요편질 잘 읽고 있다네.
 
그간 계절의 강물도 흐르고 세월의 강물도 저만치 흘러가버렸구나!
너와 내가 찬바람이 부는 바닷가 횟집에서 쓴 소주를 마셨지.
자네가 나한테 연거푸 7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미림이의 추억의 흔적을 그려보았을 때가 그리워지는 구나.

나(정수)는 이른 아침 찬바람이 불어올 때를 가장 싫어한다고 쓰여 있었다.
정수 오빠를 자유롭게 놓아주고 싶다는 미림이의 갑작스런 선언을 들었을 때가 이른 아침 찬바람이 불어올 때이었기 때문이다.
정수는 미림이가 감옥이라면 그 감옥에 종신형을 선고 받기를 원하였다.

너의 화요편지로 너의 마음과 함께하는 정수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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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파트 입구 편지통에서 편지를 들고 여우골 계곡을 통하여 광교산으로 향하였다. 여우골 계곡 언덕에도 노랗게 물든 숲이 아름다웠다. 노란 나뭇잎에 머물다 온 바람이 내 얼굴에 스친다. 숲길은 이미 노란 낙엽이 많이 쌓여 있고 약간의 비가 지나간 터라 발길에 스치는 나뭇잎의 냄새가 좋았다.

경기대 정문을 지나서 형제봉까지 단숨에 올랐다. 형제봉까지 많은 산객이 있었는데 형제봉에서 토끼재를 거쳐 시루봉으로 가는 숲길엔 찾는 사람이 적어 한적하였다. 토끼재에 이르기 전의 산길이 없는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노랗게 물든 나뭇잎에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머물다가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미림이는 삼십여 년 전 정수 오빠를 그토록 사랑하다가 노랗게 물든 나뭇잎에 머물다 어디론가 여행을 떠난 바람처럼 떠나가고 말았다. 정수와 미림이가 함께 데이트를 즐기던 숲길을 좋아하여 정수는 그녀를 아름다운 숲이란 뜻의 ‘미림(美林)’이란 애칭을 붙여주었다.

정수는 그가 젊었을 때 갑자기 배가 아파서 병원에 실려 간 적이 있다. 맹장 수술을 한 후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배에는 흔적이 남아있다. 이젠 그 수술을 받은 지가 이십여 년이 지났기 때문에 샤워할 때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그러나 미림이로부터 일방적으로 이별선언을 당한 마음의 상흔은 아직도 또렷이 간직하고 있었다.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정수는 삼십여 년이 지난 지금 무척 그리워하고 있다.

정수는 광교산 기슭의 작은 보리밥집에서 나의 잔에 막걸리를 따르며 미림이의 옛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었다. 긴 머리에 유난히도 하얀 얼굴인 그녀는 어느 곳에 가나 눈에 잘 띄었다. 나도 정수에게 시원한 막걸리를 따라 주었고 그는 연거푸 일곱 잔을 마시며 그의 배에 남아있는 수술의 흔적과 미림이로부터 받은 아픈 마음의 흔적을 모두 사랑한다고 하였다.

마치 젊은 스님을 사모하던 마을 처녀의 애절한 사연을 담고 처녀의 무덤가에 피어났다는 상사화(相思花)처럼 정수는 미림이를 못 잊어 하였고 이별선언을 당한 그 당시에도 그녀에 대한 좋은 감정을 간직하고 있었다. 삼십여 년이 흐른 지금도 우연한 기회에 옆을 스치거나 조우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만나보지 못했다고 하였다. 정수는 미림이의 모든 것을 사랑하였기에 지금 그녀를 다시 못 보는 그 자체를 사랑하며 그리워하고 있었다.

마른 풀잎
토끼재를 지나서 시루봉에 이르기 전의 산길엔 그토록 짙푸르던 풀잎이 반쯤은 누워있고 또 반쯤은 조금 누운 채로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이하고 있었다. 정수는 마른 풀잎을 보면서 미림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미림이는 마른 풀잎처럼 반쯤은 그를 놓아주고 싶지 않았고 반쯤은 또 그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정수는 그의 가슴 속 깊이 남은 사랑의 흔적을 누워있는 풀잎처럼 잘 말려서 오랫동안 잘 보관하고 싶다고 하였다.

오랜 세월이 흐른 현재 정수는 귀농하여 소백산 기슭의 작은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작년 가을에는 유기농으로 지었다는 쌀 두 말과 약간의 검정 색 서리태 콩을 택배로 보내왔다. 올 가을이 가기 전에 내려와서 쓴 소주를 나눠 마시며 미림이와 함께 했던 사랑의 편린을 모아 못 다한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고 싶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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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
자네와 내가 푸른 파도가 밀려오는 바닷가 횟집에서 마시던 쓴 소주는 영원히 잊지 못 할 거야.
소주잔에 어리는 너의 사랑의 편린(片鱗)도 함께 모두 마셔 버렸거든.
 
나는 너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뜨거운 눈물이 흘려 내렸잖아.
나는 네가 보내준 까만 서리태 콩으로 밥을 지을 때 열 댓알씩 넣어서 밥을 짓는다.
아침밥에 얹어 있는 까만 서리태 콩을 보면서 나는 항상 너와 함께 하고 있단다.

내가 올해가 가기 전에 소백산으로 산행을 떠날 계획이 있단다.
너와 함께 산행을 하고 쓴 소주를 마시며 미림이의 추억을 되새겨 보자.
너는 미림이의 아픈 사랑의 편린을 좋아하고 사랑하니까.

너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금천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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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구
제주대 해양의생명과학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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