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구
제주대 해양의생명과학부
석좌교수

날이 밝았으니 길을 나선다. 이른 새벽 얼굴에 스치는 바람이 차디찬 느낌이다. 당일 코스로 경북의 봉화는 멀고도 멀다. 몇 해 전 다녀왔던 청량산을 다시 오르기로 하였다. 불타는 단풍 숲을 그리며 먼 길을 단숨에 달려갔다. 청량산의 입구부터 단풍 숲은 불타오르고 산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청량산 입구를 지나서 숲속으로 들어서면 가파른 산길이다. 숲속은 붉고 노란 잎새 사이로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산길엔 낙엽이 쌓여있고 낙엽 밟는 소리만이 산의 정적을 깨운다. 숲속의 낙엽 밟는 소리를 들으며 20여 분 걸어 올라가면 김생굴이 나온다. 서예가 김생이 바위로 된 굴 안에서 10여 년간 글씨 공부를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여기서 김생과 봉녀(鋒女)가 글씨와 길쌈 기술을 겨루었다는 전설이 어린 곳이다.

김생굴을 구경하고 바로 경일봉으로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야 한다. 고도가 높아감에 따라 나뭇잎은 울긋불긋 그들의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여기에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다정한 친구가 된다. 이쪽 나무의 잎새에 앉았다가 바로 저쪽 나무로 여행을 떠나는 바람은 누구일까 궁금하였다. 아마도 뭇 연인들의 뜨거운 입김이 아니었을까!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기도 한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 과거의 상처를 회억하며 그것이 아름다운 사랑이었다고 추억한다.
 

 

청량산(淸凉山)의 맑고 시원한 바람이
가을이 깊어 가면 그대의 가슴으로 다가가
사랑의 길로 여행을 떠나자고 속삭인다.

불타는 오색 단풍 숲의 바람은
아픔의 상처를 아름다운 사랑이었다고 회억하는 이들에게
내가 누구의 입김인지 묻는다.
 
--- 시인 김현구, 불타는 단풍 숲의 바람은 누구의 입김입니까! ---

경일봉에서 시원한 물로 목을 축이고 자소봉을 거쳐 연적봉(846.2m)에 올라섰다. 올라온 산을 내려다보면 온 산이 붉게 타오르고 단풍 숲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내 얼굴에 스치어 간다. 가만히 눈을 감고 이 단풍 숲의 바람이 누구의 입김인지 회억해 본다. 온통 내 마음을 뺏어 갔던 그 소녀의 입김이 아닐까! 이렇게 아름다운 불타는 단풍 숲이라면 내 마음은 하늘을 나는 소년이 되어본다.

나는 지난 주 대학시절의 캠퍼스를 둘러보았다. 약 40년 전 아기 나무들은 거목이 되었고 잎새들은 노랗고 붉은 치마로 갈아입고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이하고 있었다. 대학시절 추억의 흔적을 따라 가보았다. 한적한 캠퍼스의 숲속에서 머물다 온 가을바람이 내 얼굴을 스치어 갔다. 그것은 40년 전 내 마음을 뺏어갔던 그 소녀의 입김이 아닐까 생각하였다.

연적봉에서 불타는 단풍 숲의 바람을 곰씹으며 뒤실고개와 하늘다리를 거쳐 장인봉(870m)에 올랐다. 이 장인봉을 청량산이라 일컫고 있으며 전망대에서 하산장소를 내려다본다. 급격한 경사의 내리막 산길이다. 이곳이 내리막 산길이다 보니 곳곳에 철제 사다리를 설치하였다. 사다리를 잡고 조심스럽게 내려가다 보면 불타는 단풍 숲의 바람이 친구가 되어준다.

불타는 단풍 숲의 바람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이 바람은 여러분의 가슴으로 밀치고 들어가는 바람이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다시 못 올 그리운 이의 마음속으로 여행을 떠나 보는 것을 어떨까!

김현구
제주대 해양의생명과학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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