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구
제주대 해양의생명과학부
석좌교수

산기슭 모퉁이 홀로 핀 들꽃이 가을의 문턱을 알리고 있다. 보랏빛 산국(山菊)과 이름 모를 하얀 꽃 그리고 풀잎 사이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많은 풀꽃들이 가을의 문턱에서 그들의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비가 오면 비를 흠뻑 맞고 바람이 불면 그 바람과 대화를 한다. 계절의 강물은 흐르고 어느새 여름의 끝자락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문턱에 서 있다.

오늘 산행은 여유롭게 시작하였다. 근교 산행이기에 새벽부터 나서지 않아도 좋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집에서 출발하여 아주대 뒤편인 여우골 계곡으로 들어섰다. 산책길 주변엔 가을꽃이 맞이하여 준다. 보랏빛 꽃, 하얗게 피어난 꽃 그리고 풋내 나는 풀숲의 앙증맞은 꽃까지 가을을 준비하고 있었다. 새들도 날아와 우지 짖는 숲속은 가을바람으로 가득하고 나는 시인 고지연 님의 ‘가을에게’를 읊조리며 광교산으로 진입하였다.

녹음이 짙은 나무 우듬지에
선홍빛 가을물 눈동자에 어리면
벌써부터 시려오는 가슴
날마다 물처럼 내려갈 단풍
바닥까지 내려가면 잎이 지겠지
 
가을아
이 계절은 무심히 보내기 싫어
지난여름 너무 더워 흘려보낸 날 들
가을마저 서두르면 허무함 어찌할까
잎 끝에 고운 색(色) 오래 머물러
게으름 피우며 눌러 앉아라

--- 시인 고지연, 가을에게 ---

 

경기대를 지나서 형제봉에 올랐다. 사방을 둘러보면 숲이 도시를 둘러싸고 반대로 도시에서 보면 도시가 숲을 둘러싸고 있다. 세상은 곳곳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앞세우고 싸움이 일어나고 있지만 숲은 시인 고지연 님이 지적한 것처럼 ‘녹음이 짙은 나무 우듬지에/ 선홍빛 가을물 눈동자에 어리면/벌써부터 시려오는 가슴’이 되고 있었다.

형제봉에서 토끼재로 가는 산길은 깊은 숲속으로 들어온 느낌이다. 경기대에서 형제봉까지 가는 구간보다 산객이 적어지고 숲도 더 울창하기 때문이다. 산길에 홀로 핀 들꽃들도 산객을 맞이하여 주고 숲속에 부는 바람은 어느새 가을의 바람처럼 고독하게 느껴진다. 계절의 경계인 가을의 문턱에서 토끼재를 거쳐 시루봉에 올랐다. 숱하게 올랐던 이 정상에서 역순으로 돌아오기로 하였다.

돌아오는 산길도 새롭다. 같은 길인데도 다른 풍광이 펼쳐지고 새로운 느낌이 든다. 세상일과도 같을지 모른다. 어느 프레임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같은 것을 가지고 정 반대의 해석을 내린다. 세상의 일이 지지고 볶는 와중에도 세월의 강물은 흐르고 가을의 문턱에 서 있다. 가을의 문턱에서 시인 박인환 님의 ‘목마와 숙녀’를 읊조리면 마음이 한층 가벼워 질 것이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 시인 박인환, 목마와 숙녀 ---

김현구
제주대 해양의생명과학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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