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에는 조금 독특한 면이 있다. 채소와 고기, 동물들은 덜 자란 어린 것이 가장 연하고 맛이 섬세하다. 그러나 덜 자란 과일은 보통 입맛을 당기지 못한다. 과일의 성장과정은 채소의 과정과 유사하다. 단지 저장세포의 팽창 단계에서 엄청난 성장이 일어난다. 가장 활동적인 시점의 멜론은 하루에 80㎤ 이상씩 커진다. 다 자란 과일의 저장세포들은 식물왕국에서 가장 덩치 큰 세포들이다. 수박의 경우 세포 직경이 1㎜에 이른다.

이 성장단계 동안 탄수화물은 단단한 전분 알갱이의 형태로 세포 액포에 저장된다. 감염과 포식을 단념시키기 위한 방어용 화합물들인 독성 알칼로이드와 떫은맛을 내는 타닌 등도 그 속에 축적된다. 또 다양한 효소 시스템이 가동 준비를 한다. 마침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씨앗을 퍼뜨려 줄 동물이 필요한 시기에 익기 시작한다.

익기의 과정은 사실 죽음, 즉 자기 분해의 과정이다. 탄수화물의 분해로 당은 증가하고 질감이 말랑말랑해지고, 산과 타닌 등 방어 화합물들이 사라진다. 독특한 향도 생성된다. 껍질의 색깔이 보통 녹색에서 노란색 또는 붉은색 등 눈에 잘 띄는 색으로 변하여 시각적으로 홍보한다. 과일은 익어가면서 우리의 눈과 미각의 향연을 위해 스스로를 채비하며 적극적으로 종말을 준비한다. 익는 과정을 주관하는 것은 효소들이다. 이런 효소들의 작용을 촉발시키는 방아쇠가 바로 에틸렌이다.

이처럼 과일의 향은 대부분 처음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짧은 숙성기간 동안에 만들어진다. 그리고 향은 워낙 미량이라 여러 물질에서 만들어지지만 탄수화물은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식물에서 가장 많은 것은 탄수화물이다. 광합성을 통해 포도당을 만들고 이것을 전분으로 비축하거나 셀룰로오스 같은 구조체를 만든다. 이 탄수화물에서 주로 맛 성분이 만들어지고 향기성분은 지방과 단백질에서 만들어진다.

지방산으로부터
지방산으로부터 향기물질이 만들어지는 데에는 몇 가지 경로가 있는데 대표적인 경로는 아래 그림과 같다. 포화지방보다는 불포화지방이 향기물질의 좋은 원천이 된다. 그래서 과일의 많은 향이 리놀레산과 리놀렌산의 산화적 분해에 의해 만들어진다. 과일에는 지방이 별로 없는데 지방의 산화가 풍미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될까 하겠지만 향기물질은 매우 적은 양으로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을 알면 지방의 양보다 산화된 양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식물의 엽록체에는 생각보다 많은 리놀레산과 리놀렌산이 있다. 과일이 익게 되면 엽록체가 분해되면서 이들로부터도 지방이 배출되어 향의 중요한 원료가 된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많은 에스테르와 카보닐 계통의 향기물질이 만들어진다.

지방산의 분해에 따른 향기성분의 생성

 
자료 : Handbook of fruits and vegetable flavors, Y.H. Hui

테르펜류
지방의 일종인 테르펜 물질은 침엽수, 감귤류 과일, 꽃 등에 많으며, 수많은 허브와 향신료들의 기본적인 풍미를 제공한다. 테르펜계 물질은 휘발성이 강하여 우리 코에 가장 먼저 닿아 가볍고 상큼한 최초의 인상을 제공한다. 아주 짧은 가열에 의해서도 쉽게 증발하거나 변형되는데, 과일 등에서 상큼하고 가벼운 미향들이 금세 사라져버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탄소 수가 8~9개에서 높은 향의 강도를 가지고 탄소수가 16개 이상인 분자는 분자량이 너무 커서 휘발성이 없고 향을 작용하지 못한다.

대부분 시트러스류 과일의 에센셜오일에 들어있는 리모넨이 대표적인 테르펜 물질이다. 레몬의 에센셜오일은 60~76%, 자몽은 86~95%, 오렌지는 85~95%, 맨더린은 65~75%를 차지하기도 한다. 테르펜 자체는 향이 약하지만 산화된(산소를 포함한) 형태는 향이 강하다. 시트러스 오일의 테르펜 물질은 95%를 차지하는 리모넨보다 이것이 산화된 5% 이하의 물질이 그 과일의 특징적인 냄새를 부여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시트랄(citral)은 레몬 오일의 2% 이하지만 레몬 전체의 특징을 좌우한다.

테르펜류의 생합성 경로는 아래 그림과 같다. 먼저 이소프렌(isopentenyl diphosphate, IPP)이 만들어지고 이것의 축합으로 모노-, 다이-, 트라이-, 테트라-테르펜 등이 차례로 만들어진다. 이중에서 향기물질은 모노~다이테르펜 사이의 물질 변형체들이다.

테르펜류 합성과정

 
아미노산으로부터 생성
아미노산으로부터 방향족, 지방족, 사슬구조의 알코올, 유기산, 에스테르 등 많은 종류의 향기물질이 만들어진다. 이들은 노지와 온실 등 재배 환경에 따라 효소의 양이 달라지고 향도 달라진다. 아미노산 중에서 티로신, 페닐알라닌 같은 방향족 아미노산은 아래 그림과 같은 대사경로를 거쳐 양은 적지만 아주 독특하고 차별화된 냄새의 원천이 된다.

계피의 신남산(cinnamic acid)은 독특해 보이나 모든 식물이 만드는 물질이다. 다른 식물은 계속되는 대사작용으로 다른 물질로 금방 전환되나, 계피는 그 단계에서 머무르는 양이 많은 정도의 차이인 것이다. 아몬드는 벤즈알데하이드에서 많이 머무르고, 버드나무는 살리실산 단계에서 많이 머무르는 정도의 차이인 것이다. 이것은 다른 모든 식물의 독특한 향기의 비밀이기도 하다. 특별한 대사기작이 있는 것이 아니고 중간에 멈추는 정도가 각자 독특한 것이다.

방향족 아미노산에서 만들어지는 2차 대사산물

 
심지어 부드러운 바닐라의 주 향기물질인 바닐린과 고추의 엄청나게 매운 캡사이신이 한 형제이기도 하다. 아래 그림처럼 신남산이 여러 중간 물질을 거쳐 바닐린이 된다. 바닐라 열매에는 이 바닐린 단계에서 머무르는 양이 많지만 고추에서는 계속 반응이 진행된다. 그래서 다른 아미노산에서 만들어진 8-methyl-6-nonenoic acid와 결합하면 캡사이신이 된다. 그래서인지 과량의 바닐린은 약간 매운맛이 난다고 한다.

캡사이신의 생성경로

 
자료 : B. C. Narasimha Prasad, 2006 vol.103 no.36

 
최낙언 시아스 이사

최낙언 시아스 이사
서울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식품공학을 전공했으며, 1988년 12월 제과회사에 입사해 기초연구팀과 아이스크림 개발팀에서 근무했다. 2000년부터는 향료회사에서 소재 및 향료의 응용기술에 관해 연구했다. 저서로는 ‘불량지식이 내 몸을 망친다’, ‘당신이 몰랐던 식품의 비밀 33가지’, ‘Flavor, 맛이란 무엇인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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