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이 인간의 후각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향을 만들었을 리는 없다. 식물이 필요해서 만든 물질이거나 부산물일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냄새가 없던 풀이 잘리면 냄새가 나고, 냄새가 없던 양파를 자르면 냄새가 난다. 순식간에 효소에 의해 지방산이나 전구물질이 분해된 것이다. 풀이나 양파를 자르자마자 냄새가 나는 것을 보면 냄새라는 것이 얼마나 적은 양으로 역할을 하는지와 효소라는 것이 반응 속도를 얼마나 높여주는지(100만 배 이상) 알 수 있다.

이런 향을 식물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식물은 입이 없다. 하지만 주변의 식물이나 곤충과 신호를 주고받을 필요가 있다. 이 신호를 주고받는 가장 쉬운 방법이 향인 것이다.

‘향’은 방어기작의 한 방법
나무들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 생태학적 네트워크에 대해 증기 형태로 아스피린(살리실산)을 방출한다. 이것은 식물 고유 방어체계의 신호물질로 여러 가지 식물의 조직에서 동물이 싫어하는 물질과 소화되지 않은 물질을 연쇄적으로 만드는 과정을 촉발한다. 그리고 이 물질은 인근 식물들에 의해 읽혀지고 재해석되어 그들 자신의 방어를 조절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식물은 이동하지 못한다. 초식곤충과 초식동물의 유일한 방어체계는 여러 가지 화학물질을 만드는 방법뿐이다. 식물은 향기물질로 말하는 것이다. 평소에 가만히 두면 아무런 향이 나지 않지만 강한 바람이 불거나 인위적으로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별안간 역한(?) 냄새를 풍겨낸다. 감자 싹에 들어 있는 솔라닌이나 마늘의 알리신도 제 몸을 보호하기 위한 물질이다. 어느 식물이든 자기방어물질을 내지 않는 것이 없다. 사실 항생물질까지도 생성한다. 살아남기 위해 별별 수단을 다 쓰는 것이다.

고추의 매운 맛을 함유한 캡사이신은 원래 고추가 동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든 화학무기다. 주렁주렁 달린 고추를 탐하는 것은 인간뿐 다른 동물은 탐하지 않는다. 반면, 새는 이 수용체의 형태가 약간 달라 결합하지 않으므로 전혀 매운맛을 느끼지 않는다. 새를 통해 멀리 번식하고자 한 고추의 책략이다. 좀 더 지능적인 방어도 있다. 겨자와 같은 식물은 냄새물질을 분비해 말벌을 불러들어 자신의 잎 등을 먹으려 하는 곤충을 살해하도록 하는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공격수단 ‘향’
초식동물도 식물의 적이지만 다른 식물도 적이다. 영양과 햇빛을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이다. 실제 피톤치드는 주위 식물의 성장을 방해하는 물질이다. 식물은 생존을 위해 잎줄기에서 나름대로 해로운 화학물질을 분비한다. 상쾌한 향기 덕분에 흔히 실내에서 많이 키우는 허브나 제라늄과 같은 풀들도 사실 그 물질은 다른 식물의 생존을 막거나 성장을 저해하는 물질이기도 하다. 산림욕을 이야기할 때 말하는 ‘피톤치드(Phytoncide)’는 문자 그대로 식물(phyton)이 분비하는 살균물질(cide)이다. 구체적으로 테르펜을 비롯한 페놀 화합물, 알칼로이드 성분, 배당체 등이 포함되어 있다. 주변의 식물과 작은 곤충에게는 독이 되지만 인간은 충분히 견딜 수 있다. 그런 환경이 모기나 벌레 등 성가신 작은 벌레가 적어서 인간이 쾌적하게 느끼도록 진화한 것인지도 모른다. 커피의 카페인도 사실은 방어물질이자 공격물질이기도 하다.

균류, 곤충, 동물을 불러 모으는 ‘향’
콩과 식물들이 우리에게 많은 단백질을 공급할 수 있는 것은 뿌리에 부착한 질소고정 세균 덕분이다. 콩과 식물은 플라보노이드를 분비하여 이들 세균을 불러들인다. 그리고 식물이 화분을 하기 위해 냄새로 곤충을 유혹한다. 특히 밤에 꽃이 피는 식물들이 곤충들을 유혹하는 데는 꽃의 화려한 색이나 모양보다는 냄새물질이 효과적일 것이다. 침엽수를 밀어내고 온통 꽃이 피는 식물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 것에는 이 공생시스템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식물들은 곤충을 유인하기 위해 색은 더욱 화려해지고 냄새는 다양해졌고, 꽃가루는 곤충의 다리에 잘 달라붙도록 더욱 촉촉해졌다.

우연의 산물, 부산물 ‘향’
냄새가 없던 풀이 잘리면 나는 냄새는 의도적인 것보다 부산물이다. 세포의 일부에 갇혀있던 지방분해 효소가 세포가 손상되자 세포질에 흘러나와 불포화 지방산을 분해하여 나오는 냄새이다. 식물에서는 수많은 대사가 일어나는데 그만큼 많은 분자가 합성되고 그만큼 많은 분자는 수명을 다하고 분해되면서 온갖 분해산물이 만들어지고 배출된다. 이것 중에 상당한 양이 냄새물질로 작용한다. 대표적인 것이 테르펜 계통의 물질인데 이소프렌이 2개 결합하면 테르펜이 되고, 3개 결합하면 세스키-테르펜, 4개 결합하면 디-테르펜이다. 8개 결합하여 테트라-테르펜이 된다. 원래는 이소프렌이 2개 결합한 테르펜은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냄새물질이고, 3개 이상 결합한 것은 냄새가 없는 물질인데 이들이 분해되어 만들어지는 냄새물질도 꽤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테트라-테프펜의 일종인 카로티노이드가 분해되어 만들어지는 냄새물질이 꽤 있는데 이것은 좋은 향일수도 있고 이취일수도 있다.

과일과 채소에서 향기가 만들어지는 경로는 아래 그림처럼 공통적인 것이 많다. 차이라면 과일은 숙성의 짧은 기간 동안에 이루어지고 채소는 향이 약하다가 세포가 파괴될 때 많이 드러난다는 정도이다. 그리고 과일은 에스테르가 향기의 주성분이고 채소는 황 함유 물질이 특징을 좌우한다는 차이일 것이다. 이런 향기성분의 생산은 당연히 품종과 재배환경, 영양환경 등의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개체마다 다르고 성숙도에 따라 다르며 보관조건과 기간에 따라서도 다르다.

과일과 채소의 향기물질 생성 개요

자료 : Flavor chemistry and technology 2nd, Gary Reineccius

 
최낙언 시아스 이사

최낙언 시아스 이사
서울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식품공학을 전공했으며, 1988년 12월 제과회사에 입사해 기초연구팀과 아이스크림 개발팀에서 근무했다. 2000년부터는 향료회사에서 소재 및 향료의 응용기술에 관해 연구했다. 저서로는 ‘불량지식이 내 몸을 망친다’, ‘당신이 몰랐던 식품의 비밀 33가지’, ‘Flavor, 맛이란 무엇인가?’가 있다.

☞ 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식품저널 foodnews를 만나세요. 구독하기 클릭

저작권자 © 식품저널 foodnews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