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구
제주대 해양의생명과학부
석좌교수
오늘날 생일이나 각종 기념일 때 가족, 연인, 은사, 친척 그리고 직장에서 가까이 지내는 분에게 선물이란 것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가 어릴 적 시골에서 선물을 주고받은 기억이 없다. 그만큼 먹고 사는 것이 어렵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내가 초등학교에 가려면 시냇물을 건너야 갈 수 있었다. 물론 멀리 돌아가면 커다란 다리가 있긴 했지만 대부분 시냇가에 놓여진 징검다리를 이용하였다. 때로는 징검다리가 많은 비에 떠내려가면 아랫도리를 걷어붙이고 신발을 들고 시냇물을 건너서 등교하던 생각이 난다. 이때가 1960년대이므로 대부분 어렵게 살던 시절이라 생각한다.

어려웠던 그 시절에 선물이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계절의 강물도 흐르고 세월의 강물도 흐른 오늘날 되돌아보면 나는 대단히 고귀한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어릴 적 새 봄이 오면 산수유 꽃이 노랗게 피어나고 진달래꽃은 붉게 뒷동산을 물들였다. 실개천과 동네 앞 냇가의 버드나무는 위쪽 잔가지부터 푸르게 물들어 굵은 밑둥까지 물들어 간다. 바람이 불면 논두렁과 밭 언덕의 들풀이 사랑의 노래처럼 물결을 친다. 무엇보다도 겨우내 차가웠던 바람을 이겨내고 단단한 대지를 뚫고 올라온 푸른 싹에 가만히 얼굴을 기울여본다. 향긋한 들풀의 향기가 가슴 속 깊이 젖어온다.

 
향긋한 산수유의 꽃향기와 핏빛으로 물들이는 진달래 꽃잎은 창공을 나는 어린 소년의 마음을 때 묻지 않은 자연으로 이끌었다. 오늘날도 내 고향에 봄이 오면 온 동네가 향긋한 꽃의 향기로 진동한다. 형과 나는 그 시절 꽃향기를 맡으면서 쑥, 달래, 냉이 등 봄나물을 뜯어 가면 어머니는 달래와 냉이로 반찬을 만들고 쑥으론 떡을 만드셨다. 쑥버무리라고 하는 것인데 떡의 형태가 일정하지 않고 한 주먹씩 움켜쥐고 먹으면 허기진 배를 채워 주었다. 봄날의 간식으로 쑥버무리와 더불어 노란 산수유와 핏빛으로 물든 진달래꽃 향기는 고귀한 선물이었다고 생각한다.

연둣빛 나뭇잎이 바람에 나부끼면 청순하고 깨끗한 향기가 전하여 온다. 신록의 향연이 끝나면 작열하는 태양으로 숲은 짙은 녹색으로 푸르게 변화된다. 많은 여름비가 내리면 실개천에 미꾸라지, 붕어, 피라미, 메기 등이 흐르는 물을 따라 올라왔다. 형님을 따라 고기를 잡으러 간 기억이 있는데 우리는 늘 바구니에 미꾸라지 몇 마리 잡은 기억뿐이 없다. 그러나 여름철 장마가 지면 집안의 마당까지 미꾸라지가 올라오는 경우도 있었다. 얼마 되지 않은 미꾸라지로 어머니는 추어탕을 끓이신다. 나의 어머니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추어탕을 끓이시곤 하였다.

가을이 오면 높아만 가는 파란 하늘을 이고 어머니를 따라 목화밭에 갔다. 밭 가장자리엔 키가 큰 수수를 심었고 밭 안쪽엔 목화 농사를 지었다. 우리 집엔 딸부자라서 누님들이 시집갈 때 이불을 만들기 위하여 어머니는 목화농사를 많이 지은 생각이 난다. 목화는 시차를 두고 하얗게 피어난다. 가을하늘의 하얀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는 목화송이로 누님이 시집갈 때 쓸 이불의 재료가 만들어지고 아직 피어나지 않은 푸른 목화송이는 나의 간식거리였다. 푸른 목화송이를 반으로 잘라 내용물을 쪽쪽 빨아먹으면 달짝지근한 단물이 나온다. 먹을 게 적던 시절에 고구마와 더불어 어린 시골 아이들의 간식거리로 좋은 식품이었다.

가을은 목화 농사뿐만 아니라 참깨, 콩, 차조, 호박, 무, 배추 등 여러 가지 밭작물이 풍부하였고 뒷동산의 단풍이 붉게 물들면 온 동네가 가을의 향기로 진동한다. 색동저고리보다 고운 단풍이 마을을 물들이고 나면 가장 추운 계절인 겨울이 찾아오게 된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지만 마음만은 가장 따스한 계절이다. 마을 앞 벼 수확이 끝난 논에 물을 가득 담아 얼려 놓은 썰매장이 있었다. 손을 호호 불어가면서 썰매를 지치던 시절이 그립다. 장갑이 없었어도 어머니의 따스한 사랑이 있어 마음도 손도 따스하였다. 하얀 눈이 내리면 온 동네가 설국(雪國)으로 변화되고 참새들은 집으로 찾아와 짹짹거리며 노래하곤 하였다. 나는 귀여운 참새처럼 동무들과 썰매를 지쳤고 하얗게 변화된 동네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면서 아름다운 사랑의 꿈을 꾸었다.

어릴 적 나는 고귀한 선물을 한아름 받은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계절이 변화함에 따라 봄날엔 짙은 꽃향기가 가슴으로 밀려와서 속삭였고 어머니가 만드신 쑥버무리는 허기진 배를 채우는 고귀한 선물이었다. 여름엔 오염되지 않은 실개천에서 잡은 미꾸라지로 제일 맛있는 추어탕을 먹었고, 가을엔 간식거리인 푸른 목화송이가 고귀한 선물이었다. 그리고 겨울엔 손을 호호 불어가면서 썰매를 지쳤어도 어머니의 따스한 사랑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고귀한 선물 이었다. 이렇게 자연과 어머니가 주신 크신 사랑을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오랜 도시생활을 하다가 다시 어릴 적 고향의 생각을 회상하니 그것들이 모두 고귀한 선물이란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모든 것이 변화되지만 어릴 적 고향의 산하와 어머니의 따스한 사랑을 추억할 때마다 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내 가슴은 뭉게구름 피어나는 하늘을 날고 있다. 어릴 적 고향의 추억은 언제나 나의 삶에 기쁨, 사랑 그리고 행복으로 가득 채우면서 고귀한 선물을 주고 있다.

김현구
제주대 해양의생명과학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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