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유는 어떻게 유화제 한 방울 없이도 그렇게 오랫동안 유화상태를 유지할까? 바로 단백질(카제인) 덕분이다.
첨가물 회사의 유화제 카탈로그를 보면 그 기능이 화려하기 그지없다. 참으로 안 쓰이는 분야가 없고 못하는 기능이 없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한참을 보고 있으면 다소 어이없는 것들이 발견된다. 상반된 기능이 많기 때문이다. 유화제를 넣으면 빵이나 휘핑크림은 거품이 잘 일어나서 부드러운 조직이 된다고 설명하고는 바로 아래에 거품이 많이 생겨 작업성이 떨어지면 거품을 제거하기 위해 유화제를 넣으라고 말한다. 유화제에 인공지능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거품이 필요하면 거품을 일게 해주다가 거품이 불편하면 다시 거품을 제거해주고, 수분을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는 알아서 수분을 유지해주고 수분 흡수를 막을 때는 알아서 수분 흡수를 막아주는 그런 인공지능은 있을 수가 없다.

유화제는 화학물질일 뿐이다. 결국 모든 조건이 맞는 경우에만 작용하고 조건이 맞지 않으면 의도와 정반대로 작용하는 까다롭고 제한적인 원료라고 보는 것이 옳다. 실제로 유화제는 적은 지방에 적은 친수물질을 결합시킨 아주 제한적인 원료다. 하지만 단순한 소금과 설탕이 단지 짠맛과 단맛을 부여하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색과 향, 조직감에도 영향을 주는 것처럼 다양한 용도를 개발할 수도 있다. 흔히 물과 기름을 섞는다고 하지만 실제 이용은 물과 전혀 무관한 용도가 대부분이고, 물과 기름을 섞는 기능보다 불과 기름이 섞이는 것을 방해하는 유화의 파괴 목적에 더 많이 쓰인다.

멸균한 우유는 1년이 넘도록 유화상태가 유지된다. 그렇다고 유지에 유화제를 첨가하는 경우는 없다. 우유는 어떻게 유화제 한 방울 없이도 그렇게 오랫동안 유화상태를 유지할까? 바로 단백질(카제인) 덕분이다. 식품에서도 기름은 대부분 단백질에 의해 유화상태를 유지한다. 생크림도 유단백에 의해 유화된 상태다. 생크림을 세게 계속 저으면 점점 점도가 생겨서 부드럽고 예쁘게 장식이 가능한 반고형 상태가 된다. 생크림을 휘핑하면 반고형 상태가 된다는 것은 언뜻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처럼 보인다. 가열하거나 저으면 묽어져야 정상인 것 같지만, 식품에는 이처럼 자연의 물리법칙을 거스르는 듯한 현상이 자주 목격된다.

하지만 어찌 식품이라고 물리법칙을 벗어나겠는가. 휘핑하면 굳는 이유는 유지방의 엉킴 현상 때문이다. 원래 유지방은 저온 보관되어 반고체 상태로 단백질 막에 의하여 코팅되어 서로 엉키지 않고 자유롭게 흐르는 상태이다. 유지방의 함량이 높을 때(30% 이상) 강하게 저으면 서로 부딪쳐 단백질 코팅막이 부분적으로 벗겨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막이 벗겨지면 반고체의 지방이 삐져나오고 다른 지방구와 엉키기 쉬운 상태가 된다. 그 상태로 계속 저으면 코팅막이 벗겨져 서로 엉키는 지방구가 증가하여 점점 점도가 증가한다. 이 지방구 사슬이 공기 주위를 감싸면 부드럽고 보형성이 좋은 휘핑크림이 된다. 이 상태가 과도하게 진행되면 지방구끼리 거대한 입자가 형성되어 물과 크림이 분리돼 버린다.

지방의 엉킴이 부족하면 죽처럼 흐르는 상태가 되고, 적당한 정도만 코팅막이 벗겨져서 엉켜야 적당한 휘핑크림이 된다. 지나치게 유화막이 깨지면 분리현상이 일어나 쓸 수가 없게 된다. 천연의 생크림을 코팅하는 유단백은 사실 너무 유화가 견고하여 유화막을 깨기가 힘들다. 적당한 휘핑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히 오랜 시간을 저어야 하므로 불편하다. 물론 기계를 이용하면 시간은 쉽게 단축된다. 케이크 전문점은 기계를 이용하여 휘핑하므로 시간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스크림은 아주 불편하다. 아이스크림은 가능한 한 낮은 온도에서 가장 신속히 동결되어야 부드러운 조직이 된다. 아이스크림 제조기를 통과하는 시간은 충분한 휘핑을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휘핑이 잘 되면 유지방이 상온에서 고체인 점을 이용하여 아이스크림이 쉽게 녹아 흐르는 것을 막고, 다양한 모양을 내기도 좋기 때문에 고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아이스크림 기술자들이 개발한 것이 바로 유화를 미리 약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우유의 단백질은 너무나 부서지지 않는 단단한 유화막을 형성하니 유단백 보다 약한 유화막을 형성하는 유화제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용된 유화제가 모노글리세라이드류이다. 이 모노글리세라이드를 아이스크림을 배합할 때 0.2% 정도 넣고 배합하면 균질과정 중에 지방의 유화막에 들어간다. 유단백으로만 유화된 상태는 매우 단단한 코팅막이 형성되는데 막의 일부가 이들 모노글리세라이드가 혼입됨으로 인하여 상당히 약화된다. 평소에 스스로 터질 정도로 약하지는 않지만 아이스크림 동결기를 통과할 때는 아주 쉽게 부분적으로 파괴되어 지방이 유출되고, 이 지방이 서로 엉켜서 휘핑이 된다.

아이스크림에서 유화가 깨어지는 것을 촉진하기 위해 유화제를 쓰는 이 현상은 다소 기이하여 간혹 아이스크림 개발자마저 착각한다. 아이스크림의 기본 기술은 이미 수십 년 전에 완성된 상태다. 따라서 아이스크림 개발자는 유화제와 증점다당류 각각의 원료 특성과 역할을 알고 쓰는 것이 아니라 아이스크림용으로 개발된 기성품을 구입하여 사용하고, 기성품에 증점제와 유화제가 같이 들어 있기에 증점제는 아이스크림이 녹아서 흐르는 것을 억제하고 유화제는 유화를 도와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는 정반대다. 유화제는 유화를 부분적으로 빨리 깨어지게 하여 모양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고, 증점제는 아이스크림을 녹지 않게 하지 않는다. 얼음입자가 거칠어지는 것을 막지만 오히려 동결되는 수분량을 감소시켜 빨리 녹게 한다.

이렇게 장황하게 아이스크림에서 유화제의 역할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첨가물을 실제로 사용할 때 일어나는 현상은 피상적인 정보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인터넷에서 유화제의 유해성을 논할 때 말하는 주장(유화제가 나쁜 화학물질의 흡수를 돕는다는)처럼 엉터리도 드물다. 스스로도 물에 잘 녹지 못하는 식품용 유화제가 나쁜 화학물질의 흡수를 돕는다는 이야기는 정말 어이없는 소리다. 알코올은 소수성-CH2-과 친수성-C-OH을 반반씩 가지고 있다. 이상적인 용매다. 따라서 알코올에 의한 여러 가지 물질의 용해도 증가한다.

유화제가 아닌 알코올이 나쁜 물질의 흡수를 도울 수도 있지만 주로 약이 되는 경우가 많다. 과실주, 약주라고 부르면서 많은 것들을 알코올에 담가 먹는 경우를 많이 봤을 것이다. 사람들은 예전부터 술(알코올)에 유효성분이 잘 추출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약도 물에 잘 녹지 않는 성분이 많다. 약과 술을 같이 먹으면 약의 흡수율이 높아져 과잉으로 인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알코올에 좋은 성분은 팽개치고 나쁜 성분의 흡수만 돕거나 나쁜 성분은 배제하고 좋은 성분의 흡수만 돕는 인공지능은 없다. 더구나 유화제는 어떤 물질의 흡수를 돕는 기능 자체가 없다. 그러니 유화제가 좋은 화학물질은 팽개치고 나쁜 화학물질의 흡수만을 돕는다는 식의 어이없는 이야기는 이제 그만 했으면 한다.

최낙언 시아스 이사
서울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식품공학을 전공했으며, 1988년 12월 제과회사에 입사해 기초연구팀과 아이스크림 개발팀에서 근무했다. 2000년부터는 향료회사에서 소재 및 향료의 응용기술에 관해 연구했다. 저서로는 ‘불량지식이 내 몸을 망친다’, ‘당신이 몰랐던 식품의 비밀 33가지’, ‘Flavor, 맛이란 무엇인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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