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이 맛있으려면 포도가 와인용으로 적합해야 한다. 사진은 지난 4월 14일 캘리포니아 치즈협회 주최 미디어 컨셉션에서 치즈와 함께 선보인 캘리포니아산 와인

 
뿌리 깊은 나무

포도는 옛날부터 기름진 토양에 심지 않았다. 왜냐면 서양 사람들도 기름진 땅에는 밀을 심어서 주식을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도는 놀고 있는 언덕배기의 거칠고 메마른 토양에 심을 수밖에 없었고, 포도나무는 이런 토양에서 살기 위해 땅 속 깊이 뿌리를 뻗어 저 밑에 있는 수분과 양분을 악착같이 빨아들이면서, 수천 년 동안 이렇게 적응되어 온 것이다.
 
여유가 있어서 포도를 기름진 토양에서 재배를 하면, 나무는 왕성하게 뻗어나가고 열매도 커지면서 당도가 떨어지고, 와인의 맛을 좌우하는 미량성분이 부족하여 생식용으로는 좋겠지만, 고급 와인을 만드는 데는 부적합한 포도가 열리게 된다. 게다가 유럽의 고급 와인산지에서는 단위면적 당 생산량을 얼마 이하로 규제하고 있다.
 
생산량이 규정량을 초과하게 되면 와인으로 인정을 받을 수가 없다. 좋은 와인용 포도란 양이 적더라도 당도가 높고 신맛이 적절한 것이라야 한다.
 
일조량이 많아야

포도의 당분은 광합성에서 나온다. 즉 햇볕을 잘 받아야 당도가 높아지며, 색깔도 진해지고, 향도 잘 형성된다. 반대로 그늘지거나 축축한 토양에서는 산도가 높아 신맛이 강해지며, 비가 많이 오면 알맹이는 커지지만 당도가 떨어진다.
 
그래서 고급 와인이 나오는 포도밭은 대개 남향으로 언덕진 곳에 있다. 남향이면 햇볕이 잘 들고 북쪽의 찬바람을 막아주며, 경사진 포도밭은 배수가 잘 되기 때문이다.
 
또 토양은 모래나 자갈이 많이 섞여 있어서 뿌리가 깊이 뻗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 중간에 점토가 있으면 압력을 받아 굳어져서 더 이상 뿌리가 내려가지 않는다. 뿌리가 깊으면 포도는 안정되게 지하수를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에 위에서 가뭄이 들든 홍수가 나든 전혀 관계없이 자랄 수 있다. 그래서 어린 포도나무보다는 나이 든 포도나무에서 좋은 와인이 나온다고 하는 것이다.
 
포도의 한 해 살이

포도는 4월이 되면 움이 트기 시작한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핑크빛 움이 터지면서 잎과 꽃대가 형성되는데, 이 때 서리가 내리면 치명타를 입는다. 말 그대로 싹수가 노랗게 되는 것이다. 이 서리를 방지하기 위해서 포도밭에 난로를 설치하거나 풍차를 돌려서 바람을 순환시키는 것이다.
 
‘구름 속의 산책’이란 영화를 보면 봄에 서리를 방지하고자 난로를 지피다가 포도밭을 태워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 늦서리 방지다. 포도밭 위에 자갈이 많으면 이 자갈은 낮에 햇볕을 받아 뜨거워졌다가 밤에 그 열기를 발산하기 때문에 서리 방지에 큰 도움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늦서리 피해가 거의 없지만, 일교차가 심한 포도산지에서는 그만큼 포도밭의 위치와 토양이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5월이 되면 잎과 넝쿨이 활기차게 뻗고, 6월에는 꽃이 피고 이윽고 조그만 열매가 달린다. 푸른 열매는 점점 커지기 시작하고, 8월부터는 열매가 부드러워지고 슬슬 색깔이 변하면서 익어 가는데, 이때부터 수확할 때까지는 비가 아예 안 오는 것이 좋다. 릴케의 시처럼 남국의 햇볕이 이틀이라도 아쉬울 때다. 포도가 익을 무렵은 햇볕은 뜨겁고 바람은 시원하며 고추잠자리가 왔다 갔다 하는 분위기를 떠올리면 된다.
 
꽃이 피고 백일이 되면 수확을 하는데 꼭 정해진 것은 아니다. 포도의 성숙도는 와인의 품질과 타입을 결정짓는 요소가 되기 때문에 수확 시기는 경험적으로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그래서 와인을 잘 만드는 사람은 포도의 숙성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테루아르(Terroir)

만약 여러 가지 조건이 좋지 않아, 포도의 당도가 낮으면 그만큼을 설탕으로 보충하고, 신맛이 많으면 중화제를 넣어야 한다. 그러나 인위적인 조작이 원래의 포도성분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토질이나 기후조건이 양호한 곳에서 양질의 와인이 나올 수밖에 없다. 포도가 나쁘면 비용과 노력이 더 들어가면서도 와인은 맛이 없어진다. 이렇게 포도는 와인 그 자체의 품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는 ‘테루아르(Terroir)’라는 단어 하나로 포도밭의 모든 것을 이야기해 버린다. ‘테루아르’란 단위 포도밭의 특성을 결정짓는 제반 자연환경, 즉 토양, 지형, 기후 등의 제반 요소의 상호 작용을 말한다. 이런 이유로 각 포도밭은 다른 스타일의 와인을 만들 수 있고, 특히 프랑스에서는 테루아르를 중심으로 포도밭의 등급을 매긴다. 테루아르가 좋은 포도밭은 가만히 두어도 와인용으로 좋은 포도가 열리는데, 테루아르가 나쁘면 아무리 노력해도 좋은 포도를 생산할 수 없다는 말이다.  
 
김치찌개는 김치가 맛있어야

“어떤 요리를 잘 하십니까?” “저는 김치찌개를 잘 끓여요” 흔히 들을 수 있는 대화지만, 여기에는 전제 조건이 있다. 김치가 맛있어야 김치찌개가 맛있게 된다. 아무리 훌륭한 요리사라도 맛없는 김치로 맛있는 김치찌개를 만들 수는 없다. 와인도 마찬가지다.
 
포도가 와인용으로 적합해야 와인이 맛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와인제조가 실패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후 조건상 와인에 적합한 포도가 안 나오는 데도 외국 기술자를 초청하고, 외국에 가서 와인제조기술을 배워봐야, 겨우 찌개 끓이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진작 우리나라 풍토에 맞는 품종개발에 힘을 쏟았더라면 지금 정도면 좋은 와인이 나왔을 지도 모른다. 

 
 

김준철 김준철와인스쿨 원장

고려대 농화학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식품공학과(농학석사)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와인양조학과 수료
동아제약 효소과 및 연구소 근무
수석농산 와인메이커
서울와인스쿨 원장
한국와인아카데미 원장
한국와인협회 및 (사)와인생산협회 부회장
2007 제1회 대한민국 주류 품평회 심사위원(국세청장)
2009 주류품질인증제품심사위원(국세청장)
2009 한국 전통주 품평회 심사위원(농촌진흥청 국립과학원장)

<식품저널 2011년 5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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